어릴 때 집에 할머니가 없으면 바로 베란다 창문을 열어봤다. 우리 집은 시영아파트 드넓은 단지 내에서도 외곽(표준어는 아니지만 더 적확한 표현이라면 ‘가생이’라고 하겠다.)에 자리한 동이어서 우리 집 베란다 창문을 열면 뒤편으로 마주한 물류공장 창고가 있었고. 그 사이에 자리한 조금 넓은 아파트 뒷 화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알음알음 아파트 아주머니들이 작은 밭을 일구는 자리였다. 할머니는 늘 그곳에 계셨다. 아파트 뒷 화단으로 들어서면 얼기설기 울타리를 쳐놓은 비슷한 크기의 밭이 두 개 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우리 할머니 밭이었고 그 옆은 (기억으로는) 3층 아주머니네 밭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 개의 큰 개나리 나무가 얽혀 만든 작은 개나리 동굴이 있었고, 그 개나리 동굴을 끼고돌면 왼편으로는 넓게 가시나무가 자리했다. 가시나무를 지나 옆으로 가면 또 옆 라인 아주머니들이 작게 만든 밭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이건 우리 동 뿐 아니라 옆 동 뒷 화단도 마찬가지인 풍경이었다.
그곳에 무엇을 심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대부분 흔한 채소들이었다. 노는 땅을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시대였다. 그래서 뒷밭에는 늘 먹을 것이 많았다. 어린 내게는 다 맛없는 먹을 것들 뿐이었지만.
앞 화단에는 경비 아저씨가 미관을 위해 특별히 관리해서인지, 주로 분꽃, 장미, 박하 나무 등 꽃나무가 많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노는 땅을 볼 수 없던 어른들의 비밀(어쩌면 모두 알고 있던)이 있었으니. 바로 김장독이다. 5층짜리 단층 아파트라, 사이좋게 층마다 하나씩 김장독을 묻었다. 이 얘기를 하면 그 시절 서울에서 누가 김장독을 묻고 살았냐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 김장독을 묻어둔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김치가 특별히 맛있었던가는 생각나지 않지만. 엄마의 김치가 점점 맛을 잃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추억이 바래 잊히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다.
그래서 그 시절 엄마와 이웃 아주머니들은 부지런했다. 그리고 뒷 화단에도 앞 화단에도 늘 누군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위험하지 않게 챙겨주고, 누굴 만나도 인사를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상추를 매일 먹지도 않고, 고추를 매일 먹지도 않지만. 할머니는 매일 텃밭을 가꾸었다. 누가 들어와 밭을 망칠까 봐 울타리도 치고 입구 문도 만들었다. 그때 뒷 화단에는 길고양이 말고도 족제비도 살던 때였다.
지금도 엄마는 베란다에 누군가 버린 빈 화분을 주워와 무언가를 심는다. 시장에서 산 뿌리째 있는 파를 뿌리만 쌍동 잘라 심어놓고. 어디서 고추를 하나 얻어와 키우고, 고구마 꽁지를 꼭 남겨 물에 담가 둔다. 앞서 말했듯 그렇다고 고구마 뿌리를 내려 땅에 심어 고구마를 캐 먹진 않는다. 또 우리는 매일 파를 잘라 음식을 해먹지도 않고 고추도 자주 먹지 않는다. 노는 땅은 볼 수 없다는 정서를 가진 세대여서 그렇다. 심고 가꾸는 것이 익숙한 세대여서 그렇다.
그런 할머니와 엄마를 보며 자랐지만. 나는 뭔가를 잘 키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여전히 내가 제일 어렵고, 나를 성장시키는 일에 더디게 자라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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