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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이런 날은(050)

by 혜.리영 2021. 5. 10.


엎친 데 덮친 날. 나는 비교적 회사 일을 집까지 끌고 오지 않는 편이다. 무엇이든 쥐어잡고 끌어 안고 있어봐야 풀리지 않는 일이란 게 있다. 나에게는 주로 회사가 그렇다. 잠깐이라도 점심시간에는 걷고 오려하고, 출근길에는 사내 메신저 등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한다. 퇴근길도 마찬가지다. 촘촘한 사람들 사이로 나를 끼워 넣어야 하는, 오가는 전철 안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출퇴근길에 본다고 바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 시간만이라도 편안하게 뇌를, 정서를, 영혼을 쉬게 해주는 게 더 효율을 높이는 길이다.

이렇게 사설이 길었던 것은, 그게 조절이 안 되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재택이 그 경계를 자주 허물게 하는 것 같다. 우스개 소리로, 결혼을 하면 여자친구는 언제 집에 가지? 라는 말처럼. 일을 하다보면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것이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 시간이 되어 뭐라도 챙겨 먹으려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습관처럼 새로고침을 한 번 했고, 아뿔싸. 오류를 발견했다. 의자를 빼고 일어나려던 나는 그대로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점심은 날아가고, 일은 해결됐다. 늘 그렇듯 사이좋게 일은 몰려온다. 컴퓨터가 다운되고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 회사로 뛰어갔다. 집과 회사가 그나마 1시간 이내의 가까운 거리라 가능했던 일이다. 또 재택으로 업무를 보던 중이었지만, 점심에 산책이라도 나가려고 세수도 하고 대충 차려입은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라면, 세수부터 하고 옷도 갈아입고 우왕좌왕 머리속이 더 복잡해졌으리라.

연타의 여파인지, 결국 사무실에서 퇴근시간을 훌쩍 넘겨 나왔다. 탈탈 털린 멘탈은 아직 사무실에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오전에 집에서부터 쫓아오지 못했던 건지, 어디갔는지 알 수 없었다. 터덜터덜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며, 누구라도 붙잡고 땡깡 부리고 싶었다. 떼쓰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 옷자락 붙잡고 주저 앉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마른 울음을 시원하게 울어재끼고 싶었던 것이다.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땡깡부리고 싶은 마음이라니. 그러나 나는 코트깃을 붙잡고 새침하게 맨 백팩을 바짝 올려매며 걸었다.

매일 지나치기만 했던 소바 집에 가서 생맥 반주 삼아야지 했는데. 휴일이라 문 닫았다. 매일 지나치기만 했던 역사 안 어묵과 마리김밥을 오늘은 우걱우걱 먹어야지. 휴일이라 문을 닫았다. 휴일이었다. 하루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데, 터덜터덜 집으로 직행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날이었다. 몇 주 전 아끼던 포트 와인도 홀랑 마셔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날은 잠을 설칠텐데, 잠이 오지 않을텐데.

어쩌지, 어쩌지 하며 날이 저물어갔다. 깊은 숨으로 푹푹 스트레스를 뱉으며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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