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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채칼(088)

by 혜.리영 2021. 6. 18.


하나에 꽂히면 며칠 그것만 파는 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카페가 마음에 들면 좀 멀고 돌아가는 길이라도 며칠은 그곳만 다닌다. 꽤 오래 그곳만 다닌다. 또 어느 음식점이 맛있다 싶으면 이 친구, 저 친구 만날 때마다 그곳만 간다. 내 마음에 드는 좋은 곳을 찾으면 그곳만 다는 편이다. 다양한 곳을 다니길 좋아하면서도 마음이 드는 한 곳이 생기면 줄곧 거기만 찾게 되는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던 재택근무, 점차 집에서 해먹는 것이 하나둘 늘어갔다. 작은 주방에 음식을 한다고 일을 벌리기 싫어서 아주 간단하게만 해먹고 살았다. 전자렌지 계란찜, 오트밀 등. 그러다 첫 번째로 빠진 음식이 파스타였다. 올리브 오일과 마늘만 있으면 뚝딱 만드는 파스타. 게다가 사 먹는 것과 달리 내 입맛, 취향대로 마늘과 페퍼론치노를 마음껏 넣을 수 있어서 맛이 더했다. 그러다보니 며칠 아니 몇 주 파스타만 먹었다. 요즘은 파스타 소스도 잘 되어 있어서 시중에 파는 제품을 사다 데워 먹어보기도 했지만. 역시 제일 맛있는 건, 내 취향껏 올리브오일, 마늘, 페퍼론치노를 넣은 기본 파스타였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어떻게 주구장창 매일 파스타만 먹겠는가. 그 다음으로 빠진 것이 미역국이다. 이 역시 간단하게 뚝딱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재택 근무 하는 동안은 왜 그렇게 점심시간이 짧던지. 사무실 출근할 때는 식사를 마치고 산책까지 하던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소고기 미역국이었다. 따뜻하게 속을 데워주고, 풍미로 맛을 채워주니 더없이 좋은 점심이었다. 게다가 미역국은 아무것도 없이 미역만 있어도 일품이고 또 갖가지 재료를 넣어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소고기, 바지락, 황태. 나중에 황태는 국 끓여 먹은 것보다 우물우물 씹어 먹은 것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리고 요즘 빠진 것은, 당근 라페이다. TV를 보다가 우연히 당근 라페를 알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나오는 방송에서 프랑스에서는 아침 식사로 당근 샐러드를 먹는다고 말하며 당근 라페가 스치듯 언급된 것이었다. 당근 샐러드라는 것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만들기도 쉬웠다. 그래서 당근을 사다가 바로 무쳤다. 하루 냉장고에 재워두었다가 다음날 먹으니, 완전! 정말 맛있는 맛이다. 여름철 내 입맛에 딱 맞는 맛이었다. 게다가 오독오독 씹히는 당근까지 완벽했다. 밥공기 한 그릇 가득 채워 먹어도 부담이 없고 좋았다.

그러나 당근 라페에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바로 당근 썰기였다. 어설픈 칼솜씨로 툭툭 당근을 썰어봤지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다이소에서 채칼을 샀다. 감자깍이 채칼은 있었지만, 당근용 면처럼 썰리는 채칼은 없었다. 이제 편하게 당근 라페를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으나! 아직 다이소에게는 무리였다. 칼은 잘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칼로 당근 하나를 깍기에는, 차라리 그냥 칼질을 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양한 칼날을 보유한, 채칼을 샀다. 채반도 함께 있는 멀티 채칼이었다. 택배를 받고 바로 씻어 사용했다. 사두었던 당근을 씻어 슥슥 채칼에 문대니, 슥슥 나란한 모양으로 당근이 썰렸다. 얼마나 기쁘던지! 그 자리에서 당근 4개를 모두 썰어버렸다. 반은 보관하고, 반은 바로 무쳤다. 이제 힘들이지 않고 당근 라페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는 기쁨에, 마음이 행복했다. 아침, 점심, 저녁 종일 먹어도 매일 맛있을 것 같은 맛이다. (나는 지금 한참 당근 라페에 빠져 있는 중이다.)

채칼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지다니. 이런 쇼핑은 충분히 칭찬 받을만 하다.
내일은 당근에 양배추도 썰어 함께 무쳐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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