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있다. 몇 주 전 이마트에서 할인하는 민소매를 샀다. 기대하지 않아서 인지 쏙 마음에 들었다. 할인 기간이 지나지 않게 한가한 일요일 낮 이마트로 향했다. 저 멀리 이마트가 보이고, 횡단보도를 건너 가까이 가는데. 아뿔싸. 오늘은 휴무일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건 꼭 이런 날 쓰는 말이겠지. 일요일 한낮 문 닫은 이마트 앞에 나는 서 있다. 그날 따라 날씨가 너무 좋았고, 나는 장보러 아주 가볍게 나온 차림이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기 아쉬워 근처인 본가로 향한다. 이렇게 들어가기 허전해 근처에서 조각 케이크 사들고 간다.
곰은 백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는데. 지난 백일간 나는 블로그에 에세이도 일기도 아닌 글을 남기며 무엇이 되었을까. 백일이 시작되던 초반에는 내 바깥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회사가 흔들렸고, 가족이 아팠다. 하나씩 작은 안정을 되찾아 가며, 후폭풍 같은 감정이 나에게 밀려왔다. 심리적 고립감을 스스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 바다로 가는 길, 길고 짧은 터널을 지나가듯이 모든 건 지나갔다. 이제 나에게도 작은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다.
일기도 에세이도 아닌 글을 쓰며, 모르고 지나갔을 나를 붙잡아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냉소를 쥐어주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안도하다가 아직 가시지 않은 칼바람에 아파도 하다가. 백일이 지났다. 내외부로 아무 일 없던, 시작하던 첫 3일간에는 이 백일을 다 채우면 이것을 묶어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쓰다보니 내가 내 글에 만족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래서 지난 백일을 하루도 빠짐 없이 채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자화자찬의 마음이 크다. 책으로 만들자는 생각도 점점 구체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루 남은 백일 전, 구십 구일. 문득 생각이 스쳤다.
이게 책이 될 수 있을까. 문 닫은 이마트 앞에 홀로 선 대충 챙겨입고 나온 내가, 나들이라도 가야할 듯 맑고 쾌청한 날씨 앞에서 초라해졌다. 이걸 누가 읽을까. 쓴 글을 하루이틀 지나 다시 읽으며 잘 썼다고 자찬하던 내가 우스워 보였다. 이 글들이 책이 되는 게 무슨 의미일까. 백일을 하루 앞두고 느닷없이 초라하고 허무한 생각이 든 것이다.
어느 영화배우가 썼다는 책을 읽을 적이 있다. 문장이며 내용이 그저 블로그에 쓴 글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어느 영화 평론가가 썼다는 초기작도 그 정도의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나도 블로그에 글을 모으면 묶어서 책 낼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모을 수는 있지만, 나는 영화 평론가도, 영화배우도 아니다. 일전에 글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TV에 나오는 일은 흔치 않으니 나오는 것이라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나 평범한 일은 TV에 나오지 않는다고. 책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고 주목 받을 만한 것이 있어야 책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 백 번 글을 모아도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티끌은 모아도 티끌이라던 인터넷 우스개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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