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03 톰보이
며칠 전부터 오가며 귀에 들어오는 노래가 있다. 혁오의 ‘톰보이’. 오랜만에 소주가 달던 어느 밤, 술집 화장실에 그 노래를 들었다. 달달한 술이 입안에 남았고, 음악은 화장실에서만 크게 울렸다. 톰보이가 울리는 화장실에서 난 가슴이 뛰었다. 혁오의 부르짖는 음성은 그 밤부터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나는 톰보이가 될 수 없는 나이다.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고, 웃음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약속과 약속에, 가방을 짊어진 한쪽 어깨는 빨갛게 짓눌렸다. 그러나 기분은 붕 뜬 듯 했다. 발이 허공에 살짝 뜬 듯, 내딛는 걸음마다 가볍고 낯설었다. 집에 돌아와 뻗으며, 결국 터진 생리를 보며. 그래서 그랬구나. 오늘 생리 시작이어서 그런 기분이었구나. 나의 기분과 마음은 어느 때부턴가 날씨와 호르몬에 따라 움직였다. 생리즈음이라서 그래, 비가 와서 그래, 가을이 와서 그래. 하늘이 높아져서 그래, 눈이 와서 그래, 코끝이 시려서 그래. 모든 것은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더 자주 겪은 시기를 보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늦은 밤까지도 ‘톰보이’는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스트리밍 앱을 열어 ‘톰보이’를 틀었다.(이 문장은 굉장히 낯설다. 앱을 열어 음악을 틀었으니까.) ‘톰보이’ 첫 가사는 이렇다. ‘난 엄마가 늘 베푼 사랑이 어색해. 그래서 그런 건가 늘 어렵다니까. 잃기 두려웠던 욕심 속에도. 작은 예쁨이 있지.’ 나 역시 그랬다. 엄마가 베푼 사랑이 어색했다. 늘 베푼 사랑도, 늘 어색한 마음도. 둘다 늘 그랬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것들을 모르길 바라지만, 나는 늘 예민했다. 속엣 것들은 밖으로 나오려 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건드렸다. 늘 베푼 엄마의 사랑을 나는 왜 늘 어색헤했을까. 사랑이 그리웠고, 엄마가 그리웠는데 말이다.
오늘 약속과 우연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단 한 명에게만 최근 나의 확신이 서지 않는 결정을 말했다. 근 칠팔 개월만에 연락하고 만난 사이인 사람에게 말이다. 서로 전달 받을 것이 있어 만나는 의무적인 약속과 만남이었음에도. 나에게 베풀기만 해주는 착한 사람에게 나는 나의 최신상 생각을 말해준 것이다. 나는 상담과 풀이보다는 격려와 지지가 필요한 사람이다. 나조차 타인의 생각과 말을 풀어내려고만 하면서. 나는 격려와 지지를 나의 온 삶으로 원하고 있다. 그래서 ‘톰보이’가 떠나지 않았던가보다. ‘우린 사랑을 응원해’ 원하는 것이 담긴 이 구절까지 닿고 싶어서.
그러나 나는 아직, ‘그래서 그런 건가 늘 어렵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