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이 벽에 부딪히지 않는 자유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수직의 빌딩 숲에 길들여진 도시의 눈. 그 눈이 당진 신리 성지의 들판에 닿는 순간, 우리는 기분 좋은 당혹감에 빠진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야를 가로막는 전신주나 건물이 없다. 하늘과 땅이 정직하게 맞닿은 수평선. 그 '시각적 정적'이 이곳 신리 성지가 여행자에게 건네는 첫 인사다.
사순, 교회는 우리를 광야로 부른다. 성경 속 광야는 결핍의 장소인 동시에 오직 하느님 한 분만으로 채워지는 은총의 장소다.
신리의 드넓은 내포 평야는 그 자체로 훌륭한 '신앙적 광야'가 되어준다. 빽빽한 스케줄러와 끊임없이 울리는 메신저 알람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 채워 넣어야만 안심했던 나의 강박들. 그것들이 이 거대한 여백 앞에서는 한낱 먼지처럼 흩어진다.
논밭 한가운데 솟아오른 붉은 벽돌의 순교 미술관. 날카로운 시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현대적 건축물이 평야의 부드러운 곡선과 이루는 긴장감. 그것은 마치 세속의 한복판에서 신앙을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오 4,4)
광야의 유혹은 대개 '결핍'을 건드린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유혹은 오히려 '과잉'의 형태로 찾아온다. 더 많은 성과, 더 완벽한 평판, 나를 증명해 줄 확실한 타이틀들.
미술관 옥상 전망대에서 논둑이 그려놓은 거대한 기하학적 문양을 응시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결국 '비워진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미술관 지하로 내려간다. 외부의 빛과 소리가 완벽히 차단된 침묵의 경당.
지상의 광활함이 '확장'의 비움이었다면, 이곳은 '응축'의 비움이다. 소리가 소멸된 공간에서 나는 비로소 사회적 이름표를 떼어낸다. 하느님 앞에 홀로 선 연약한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아직 봄의 초록이 올라오기 전. 마른 흙의 색과 회색빛 하늘이 맞닿은 무채색의 신리는 사순의 진정한 색깔을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단단한 것. 비어 있어서 오히려 신비로운 것.
이제 다시 소란스러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평선을 품과 온 눈은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에 신리의 들판을 품고 살려 한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억지로 메우려 애쓰기보다, 그 빈 공간에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여유.
그것이 이번 사순 시기에 내가 신리에 머물러 얻을 가장 귀한 기념품이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당신의 일상에서 가장 먼저 비워내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요?
📍 당진 신리성지
"한국의 카타콤, 지평선 위로 흐르는 비움의 미학"
- 위치: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성지길 120
- 특징: 조선시대 최대의 천주교 교우촌으로, 순교 미술관과 다섯 성인의 경당이 넓은 평야와 어우러진 곳입니다. 2017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 관전 포인트:
순교 미술관: 내포 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담은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지평선이 압권입니다.
다섯 성인의 집: 초가집 형태를 재해석한 경당들이 평야 곳곳에 흩어져 있어 고요한 산책과 묵상이 가능합니다.
- 이용 안내: * 미술관 관람 시간: 09:00~17:00 (매주 월요일 휴관)
- 미사 시간: 매일 오전 11:00 (월요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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