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뻔한 얘기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관용어구가 와 닿고 뻔한 말들이 정답인 때 말이다. 나의 존재가 특별한 것처럼, 내 상처 또한 특별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아픔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두 다 그런 상처 하나씩 갖고 있는 것 아닐까.
마땅히 보고 싶은 영화를 찾지 못해 넥플릭스를 뒤지다, '변산'을 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배우 고준을 중심으로 편집한 소개 영상이어서, 배우 고준의 스토리 위주로만 영화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시작에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내가 영화를 잘못 튼 줄 알았다.
# 고준
앞서 말했듯, 고준이 생각나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 '열혈사제'가 막 끝난 쯤이었을 것이다. 각종 매체에서 고준에게 관심을 보이던 시기였다. '열혈사제'와 '변산'에서 똑같이 깡패 역할이다. 그러나 드라마도 영화도 애초에 따뜻한 영화여서인지 아주 나쁜 깡패로 나오진 않는다.
'변산'에서 용대(고준)는 기껏 미경(신현빈)을 꼬시겠다고 집으로 쫓아 들어가서는 도발적인 미경의 행동에 고분고분 얼음이 된다. 그때 미경이 용대의 얼굴을 마치 만득이 인형이라도 되는양 만지는 장면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장면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고, 느닷없이 그 장면이 보고 싶어서 '변산'을 봤다. 다시 봐도 그 장면에서 용대, 고준의 얼굴은 정말 귀엽다. 내 맘대로 될 것 같은 얼굴이다. 뭔가 아무 거리낌 없이 무엇이든 해도 될 것 같은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게 용대였다.
# 김고은
김고은이 나오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초반에 김고은이 나오는 걸 보고 '영화 잘못 틀었나' 싶어서 껐다가 굳이 다시 '변산'을 검색해서 틀었다. 그런데 또 김고은이 나와서 '어라' 싶었다. 고등학생인 선미에게서는 '도깨비'의 여주인공이 보였다. 아마 '은교'의 여주인공이기도 했겠지. 살짝 비슷한 패턴의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보니 비슷한 성격의 역학이었다. 김고은에게 비슷한 성격의 역할만 들어오는 건가 싶기도 한데...내가 더 본 작품이 없어서 모르겠다.
선미는 참 고정적인 인물이다. '변산'의 인물들은 다 그렇다. 인물의 변화가 없고 관계도에 따라 전형적이다. 그래서 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내내 뻔한 플롯과 뻔한 인물이 뻔하게 영화를 이끌어가는데. 이상하게 보는 나의 감상은 뻔하지가 않다. 각 배우들이 종종 하던 비슷한 배역을 맡았는데 꼭 1mm 정도의 섬세한 표현이 더해져 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김고은 또한 그랬다. 참 신기한 영화다.
# 박정민
연기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고 다양한 매체에서 극찬을 받는 배우 박정민. 영화 '동주'를 봤지만 그렇게 잘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박정민의 책을 우연히 먼저 봤다. 배우에 대한 정보도, 책에 대한 정보도 없이 우연히 읽었는데. 그냥 그랬다. 블로그에 쓴거 책으로 묶었네, 배우라서 그 후광으로 유명해진 책인거네, 정도로 나는 그닥 별로였다.
'변산'을 다 보고 나니 다시 그 책이 궁금해졌다. 정확히는 배우 박정민이 궁금해졌다. 뻔한 스토리에 고정화된 인물들이 정해진 플롯대로 움직이는 영화라고 생각되는데, 그 영화에 숨을 불어넣은 게 박정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수 역할의 박정민의 연기가 영화에 숨을 불어 넣었다. 자기 상처만 크고 자기도 똑같은 칼날로 주변에 상처만 주고 있던 학수. 앞서 말한 것처럼 아주 작은 디테일, 포착하기 어려운 묘한 아우라로 영화 내내 이 뻔한 영화를 살려낸 것 같다.
다시 말해도 영화는 참 뻔하게 끝난다. 고정화된 인물이 정해진 이야기로 뻔하게 만들어진 영화가 '변산'인데. 그것만으로 말하고 말기에는 뭔가가 있다. 뻔하게 쓰인 산문시를 읽은 느낌이다. 시를 잘 쓰던 학수가 래퍼가 된 것처럼. 잘 쓰인 산문시가 읽혀진 것 같은 모습이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이 노을 밖에 없네
나 역시 지난 어느 때에 서울을 떠나 바닷가 마을에서 살며 매일 저녁 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때가 있었다. 보여줄 것이 노을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비루함이더라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값진 가치이다. 나는 가난해서 가진 게 마음 뿐이라 마음 밖엔 줄게 없다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마저도 가난해져서, 오는 마음도 잘 못 받는 것 같다. 내가 참 안쓰럽다. 그래서 학수의 디테일이 와 닿았고, 그 앞에서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될 얼굴 하나 갖고 싶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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