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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영화

[소공녀] 너만 있으면 충분해

by 혜.리영 2020. 4. 19.

 

    친구와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이 부는 공원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서로의 지금에 대해 말하고 듣고. 친구가 영화 '소공녀'를 보라고 추천했다. 포스터만으로는 그리 끌리지 않던 터라 보지 않았는데. 친구와 술에 대해 얘기하다가, 위스키 얘기가 나오고 자연스럽게 이 영화 얘기가 나왔다. 담배와 위스키, 너만 있으면 충분해.

 

 

 

 

# 담배

    전기도 끊기고 보일러도 돌지 않는 방에서 미소는 겨울을 나고 있다. 사랑마저도 봄으로 미뤄야하는 겨울이다. 겨울을 보내는 것은 따뜻한 방구들이 있어도, 새콤한 귤이 있어도 갑자기 들이닥치는 휑한 찬 바람에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미소는 바깥과 다를 바 없는 단칸방에서도 찬바람에 몸서리 치지 않는다. 미소를 따뜻하게 지켜주는 건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너.

    담배는 습관적으로 또는 마음에 엉켰을 때 생각난다. 미소는 방을 빼야할 때, 후배인 대용과 함께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핀다. 단칸방을 버리고서라도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것마저 없으면 미소는 '자기'가 채워져야 살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누군가는 몸의 욕구가 채워져야 하고, 또 누군가는 마음의 욕구가, 지식의 욕구, 영적인 욕구 등등. 사람마다 꼭 필요한 욕구가 있다. 그 다양성에서 미소는 '자기'가 채워져야 세상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 읽혔다. 캐리어 하나 백팩 하나의 짐만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온전한 자기가 있어야 가능한 삶이라 생각한다.

 

 

 

 

# 위스키

    나는 위스키를 그닥 즐기지 못했다. 위스키에 흥미도 없고 딱히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아서 아직 나에겐 낯선 술이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우연히 2차로 바에 가게되고 그곳에서 추천으로 위스키 한 잔을 마셨다. 세.상.에. 너무 맛있었다. 나에게 딱 맞는 술이었는지, 그 향과 목을 지나 식도를 지나 내 몸 안을 감도는 위스키가 너무 좋았다. 한 주 동안 그 위스키 생각에 행복할 정도로.

    미소는 위스키 한 잔이 꼭 필요하다. 영화를 보고 바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처럼, 그래 나도 미소처럼 어느 바에서 조용히 좋아하는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온전한 행복감으로 나를 채워야 겠다는 생각. 요즘 주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온전히 나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찾아, 나를 채워 즐겁게 살자. 미소의 삶이 즐거운지는 모르겠지만, 담배와 함께 위스키가 있다는 것이 좋아보였다. 미소는 '주거'를 포기하고 담배와 위스키를 선택할 정도의 강단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해서. 그래서 나는 미소가 환상이나 요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 우리가 어느 시절에 버린 순수한 그 상태

    돈도, 경력도 무엇도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온전히 그 자체로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시기와 대상은 달라도 그 자체로 즐기고 행복하던 시절. 미소와 친구들이 함께 했던 밴드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 속에서 각자 사회의 삶을 살아가며 밴드를 즐기던 그 때의 자신은 그 시절에 두었다. '밴드의 나' 옷을 벗고 '대기업 직원이 된 나', '전업주부가 된 나', '빚만 남은 이혼남이 된 나', '반백살 백수가 된 나', '고상한 마님이 되 나' 미소는 그때의 미소도 지금의 미소도 그대로다.

    끝까지 미소와 함께 했던 남자친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다. 그가 남긴 말은 그를 잡을 수 없게 한다. 오랜 웹툰 작가 도전에 늘 미끄러지던 한솔은 자신이 뭔가에 뽑힌 건 이게 처음이라고 하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삶은 얄굿어서 바라고 바라는 것은 매번 고배를 마시고, 생각도 없이 던진 것은 덜컥 합격의 잔을 내민다. 한솔마저 떠나보내고.

 

    장례식장에서 다 함께 모인 모두는 미소에 대해 얘기한다. 지금은 어디가 있는지 모를 미소.

    나는 그냥 그대로 미소의 행방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는 내내 미소는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모두가 한때 가졌던 순수하게 즐기던 자아, 그냥 그 상태를 인간으로 형상화 시키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소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살다보면 사람은 세상에 긁히고 다져져 그 순수함은 그 시절에 두고 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다. 나의 한 시절이 아쉬워서 일 수도 있고.

 

 

 

 

    미소는 밴드 멤버들의 집에 갈 때마다 계란 한 판을 사 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에서 엉망이 된 그들의 삶을 정리해주거나 위로해 주거나 잠시 꿈이 될 기쁨을 준다. 미소는 그 와중에도 만나는 이들에게 미소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준다. 돈도 말도 아닌, 마음. 그러나 멤버들은 각자의 이유로 미소를 붙잡거나 내보낸다. 미소의 말 중에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나는 너희를 그 단칸방에 언제든 받아줬고 부대끼며 같이 자는 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나는 요즘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게 부대끼고 힘들어졌다. 여태 내 삶에 긁히느라 누구 하나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으면서, 이제는 그 시도조차도 힘들고 버겁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미소의 말이 인상깊었다. 계란 한 판으로 몇 년 만에 연락한 밴드 멤버들의 집에 스며들듯 들어가는 미소가 좋아보였다. 그들의 삶에 들어가는 건  미소 또한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였으니까.

 

 

    영화 후기를 쓰다보니, 조만간 바에 가야겠다. 위스키 한 잔 마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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