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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영화

[비포선라이즈] 그대는 나를, 난 그대를 이끄네

by 혜.리영 2020. 4. 21.

 

    1996년에 나는 아직 십대였다. 그리고 스물이 넘어 '비포선셋'이 개봉하며 그제야 '비포선라이즈' 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비포선셋'이든 '비포선라이즈'든 둘다 별 흥미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리숙하고 미숙해서 대화가 길고 잔잔한 영화에는 그닥 흥미가 없었다. 특히 이상한 편견으로 미국영화는 블록버스터, 재난, 오락 영화로만 생각해서. 더더욱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십대도 이십대도, 삼십대도 넘어가는 때에 이제야 봤다. 스물네살인 셀린과 제시의 생각과 말이, 둘의 대화가 그 시절 내가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짝 후회가 일어났다. 그래서 이제야 한 편, 한 편 보게 되었다. 비포선라이즈를 보고는 여행을 가고 싶기보다는, 요즘말로 '티키타카'라고 하는 대화가 하고 싶어졌다. 너는 그렇구나, 나는 이렇단다 싶은 대화 말이다.

 

 

# 설득 당했어

    제시와 셀린은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다. 다른 자리에 앉았음에도 이미 곁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으리라. 시쳇말로 흰자 본다고 하지 않던가. 왕왕 울어대는 아이 덕에 자리를 옮겨 인사를 나눈 두 사람. 그리고 식당칸에서 더 길게 나눈 대화. 먼저 내려야하는 제시는 셀린에게 나와 함께 지금 내리자고 제안한다.

 

"나와 함께 비엔나에 내려요."

 

    그리고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짧은 하루를 함께 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 모두 낯선 비엔나에서. 제시는 미국에 살고 있고, 셀린은 프랑스에 살고 있다. 그 사이 비엔나. 둘다 이방인이 되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관광을 하며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나는 것에 대해. 그리고 한 조각씩 자신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좋은 대화들이 참 많아서 하나하나 꼽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것은 영화 초반 같이 비엔나에서 내리자는 제시의 말과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셀린의 말이다.

 

"설득 당했어. 열차 휴게실에서 자기 얘길 하는데. 증조 할머니 유령을 봤다는 거야. 뒤뜰에서 햇빛을 보며 물을 뿌렸을 때 나타난 무지개 너머로 할머니가 나타났다는 거야. 그때 홀딱 반했어.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품은 꼬마 애를 상상해봐. 난 덫에 걸렸어."

 

    셀린과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고자 설득하던 제시의 말에 새초롬하게 통통 튕기던 셀린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때에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셀린은 제시에게 반했다. 연애의 과정이 비슷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지점에서 용기를 내야한다. 둘 중 하나는 손을 내밀어야 하고 둘 중 하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못한다고, 안 해준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손을 못 내민 건 손을 잡아줄거란 확신이 없었던 거고, 내가 손을 못 잡은 건 상대가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연애를 꽤 못하는데, 내가 참 못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돌아봤다.

    비엔나는 두 사람이 대화하라고 만들어진 도시 같았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쏟아지던 도시.

 

 

 

 

# 덧없는 연락

    두 사람의 사랑이 낭만적이라 말했던 건, 제시는 미국에 살고 셀린은 프랑스에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스물네 살이다. 국경을 옮겨, 주거지를 옮겨 만날 수 없고 이후에 주고받는 먼 연락이 지금의 순간을 한 겹 한 겹 빛 바래게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이 제시와 셀린 두 사람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한 지점이었다. 어쩌면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가 그들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을 빛나게 두고, 딱 1년 후 기약을 잡는다. 서로의 빛을 바래는 종종 연락을 과감히 하지 않고 1년 이라는 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한창 타오를 마음, 보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를 텐데. 두 사람은 과감히 이 순간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일 년 후를 기약한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보였다 감췄다 하며 여행지에서의 로맨스와 그 이후의 연락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무모한 여행지에서 단 하루의 여행을, 이 로맨스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눈 것이다. 나와 같은지, 다른지. 물론 서로 자를 들이대며 재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그렇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끊임없이 그렇게 흘러간다. 너는 그렇구나, 나는 이런대.

 

# 밀크쉐이크

    영화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이다. 밤, 강변을 걷던 두 사람은 강변 시인에게 주제어를 주고 시 한 편을 받는다. 시인은 시인이다. 두 사람에게 꼭 맞는 시였고, 정말 좋았던 시이다. 이 시가 나오고. 다시 한 번 왜 진작 나의 스물네 살에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던가 후회가 들었다.

 

 

밀크쉐이크
허망한 꿈
리무진과 속눈썹
귀여운 얼굴에서
와인잔에 흘리는 눈물
저 눈을 보라
그대는 어떤 의미인가
달콤한 케익과 밀크쉐이크
난 꿈 속의 천사, 난 환상의 축제
내 생각을 맞춰봐요
추측은 말아요
고향을 모르듯 목적지도 알지 못해요
삶에 머물며
강물에 떠가는 나뭇가지처럼
흘러가다 현재에 걸린 우리
그대는 나를, 난 그대를 이끄네
그댄 날 모르는가?
아직 날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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