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4일, 실버데이
달력에는 적혀 있지 않은, 연인들을 위한 날이다. 7월 14일 실버데이는 연인들이 은반지를 주고받으며 미래를 약속하는 날이란다. 상업적인 마케팅에서 출발한 가벼운 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Silver)'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읊조리다 보면 문득 생각의 깊이가 달라진다.
은은 금처럼 화려하게 번쩍이지 않는다. 가만히 두면 공기와 닿아 거뭇하게 변하기도 한다. 사람의 손때를 타고 세월을 겪으며 제만의 깊은 빛깔을 찾아가는 광물이다.
손때를 묻히며 함께 나이 드는 일
화요일 퇴근길,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은반지 하나를 꺼내어 본다. 광택은 사라지고 둔탁한 빛을 내고 있다.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시간의 흔적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관계도 은을 닮았다. 처음의 불타오르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뜨거움이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익숙함과 편안함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권태라 부르지만, 실은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단단해진 연대의 증거다.
쉽게 만나고 가볍게 돌아서는 시대다. 반짝이는 순간만을 좇는 사랑은 나약하다. 거칠고 때 묻은 일상을 함께 통과하며, 은근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관계가 아름답다. 묵묵히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 그것은 신앙을 마주할 때의 겸손함과도 닮아 있다. 화려하지 않아도 변치 않는 마음을 생각한다.
은빛 윤슬이 내려앉는 고도, 충남 부여
한때 화려했으나 이제는 은은한 흔적으로 남은 백제의 고도, 충남 부여로 향한다. 7월의 늦은 오후, 백마강(금강) 강변에 선다.
기우는 해가 강물 위로 은빛 물비늘을 일구어낸다. 금빛처럼 눈이 부시지 않아 오히려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게 만든다. 잔잔한 강물이 오랜 세월 동안 흐르며 빚어낸 평화로운 풍경이다.
강을 나와 정림사지로 걸음을 옮긴다. 텅 빈 터 한가운데,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오층석탑이 서 있다. 비바람에 깎이고 거뭇하게 때가 탄 돌의 질감이 단단하고 숭고하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켜온 것들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화려한 장식 없이도 깊은 울림을 주는 탑의 곁을 조용히 거닐며, 상하지 않고 깊어지는 관계의 가치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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