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산업
1995년, 한국 천주교는 매년 7월 셋째 주일을 농민주일로 정했다. 그 전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됐다. 농산물 시장이 열렸다. 농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교회는 선언했다. 농업은 인간과 자연이 협력하여 하느님 창조사업에 가장 친숙하게 동참하는 생명산업이라고. 30년이 지났다. 쌀값이 폭락했다. 농촌 인구는 줄었다. 전국 읍·면 중 인구 2천 명 미만 지역의 비율이 1990년 2.1%에서 2020년 약 25%까지 늘었다. 소멸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아졌다. 공소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무너진 채 방치된 공소들이 있다. 선언은 그대로인데, 현실은 계속 달라지고 있다.
풍경이 아닌 것
주말마다 길을 나선다. 농촌을 지나쳐 간 적이 얼마나 많은가. 차창 밖으로 논이 펼쳐지면 잠깐 눈을 주다 지나쳤다. 예쁜 마을이다, 고즈넉하다, 사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떠났다. 그 논에서 누가 무엇을 버티고 있는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농촌을 풍경으로 소비해온 것이다. 농민주일은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가 보는 날이다. 지금 밥상 위에 오른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것을 기르는 손들이 지금 어떤 계절을 통과하고 있는지. 그 연결을 잠깐이라도 붙드는 날이다. 농촌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는 본래 하나였다. 공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기도하는 공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흩어진다는 것이다.
여행지
전북 익산 — 나바위성당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 있다. 처음엔 한옥이었다. 1906년 이후 서양식 벽돌과 고딕 종탑이 더해졌다. 한옥의 몸통 위에 서양식 종탑이 얹힌 묘한 풍경이 국가지정 사적 제318호다. 성당 마당에 서면 논밭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수백 년째 그 자리다. 농촌이 흔들리는 지금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7월이면 벼가 자라는 들판과 오래된 성당이 한 화면 안에 들어온다. 그 풍경이 농민주일에 어울린다. 나바위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성당 마당에 한동안 서 있었으면 한다. 논을 바라보면서.
전북 완주 — 천호성지
"천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
천호(天呼)라는 지명이 그렇게 풀린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충청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선교사도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신앙을 지켰다. 그것이 공소가 됐다. 농민이 곧 신자였고, 신자가 곧 농민이었던 자리다. 공동체가 따로 있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였다. 지금은 조용한 성지다.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진 봉안 경당과 피정의 집이 있다. 산이 깊고 여름이면 울창하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맞다. 공소들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공소가 시작된 자리에 가보는 것. 그것이 이 주일에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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