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속의 높은 자리보다 나은, 첫 순교자
그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곁을 지켰던 제자다. 본래 성격이 급하고 불같아 ‘천둥의 아들’이라 불렸고, 생전에는 스승의 권력 옆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를 탐했던 세속적인 열망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서와 교회의 역사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전혀 다르다. 그는 기원후 44년, 사도들 중 가장 먼저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형을 당해 숨을 거두었다. 세속의 높은 자리를 바라던 이는, 역설적이게도 사도들 중 가장 먼저 목숨을 바치는 ‘첫 순교자’가 되었다.
비워내야 마주할 수 있는 참된 여정
처음에는 그저 높은 자리에 앉아 채우고 싶었던 야고보가 어떻게 가장 먼저 자신을 통째로 비워내는 순교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그가 걸었던 ‘길’에 있다.
그는 주님의 부활 이후, 당시 땅끝이라 여겨졌던 스페인의 이베리아반도까지 걸어가 복음을 전했다. 샌들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홀로 흙길을 걷는 동안, 그의 내면에 가득 차 있던 헛된 욕망과 집착들이 땀방울과 함께 하나씩 씻겨 나갔을 것이다. 길 위에서 철저하게 비워졌기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칼날이 목에 들어오는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일상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대개는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분주히 발을 놀린다. 야고보 사도의 축일은 그 걸음의 방향을 질문하는 날이다. 참된 여정은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의 얄팍한 욕심을 걷어내기 위함이다. 집필자가 매일 마주하는 지치는 출퇴근길과 삶의 무게 앞에서도, 비워냄의 은총은 여전히 유효한 묵직한 이정표다.
광장의 배낭과 숲길의 이름 없는 무덤
성 야고보 사도의 숭고한 비움의 영성은 스페인 북서부의 대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Santiago de Compostela)에 머물고 있다.
사도의 유해가 묻힌 곳이자, 전 세계 순례자들이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도달하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종착지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거대한 성당의 화려함이 아니다. 오랜 시간 거친 길을 걸어 마침내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낡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이다. 그 내려놓음의 순간, 인간은 신 앞에 가장 순수하고 단단하게 비워진다. 사도가 걸었던 고독한 길의 끝에서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집착을 묻는다.
스페인의 광장이 사도가 머물렀던 종착지라면, 경북 칠곡의 한티순교성지 ‘한티가는길’은 우리 땅에서 참된 비움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는 숲길이다.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포졸들의 칼날을 피해 걸었던 험한 산길을 이어 만든 총 45.6km의 도보 순례길이다. 그 길의 끝에 자리한 한티순교성지에는 거창한 기념비가 없다. 오직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농사를 지으며 신앙을 지키다 묻힌 나지막한 돌무덤들이 숲속에 점점이 누워 있을 뿐이다.
토요일 오후, 우거진 여름 나무 사이로 정적만이 흐르는 한티의 흙길을 느리게 걷는다. 국경과 시대를 넘어, 길의 끝에서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던 이들의 발자취가 푸른 숲 위로 겹쳐 흐른다. 오늘 내가 쥐고 있는 무거운 욕심은 무엇인지, 사도가 마주했던 참된 내려놓음의 은총을 생각하며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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