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시리즈를 미드나잇까지 보고 나니, 이 감독?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느껴졌다. '시작' 그것은 시작이었다. '비포 선라이즈'는 예정된 시작이었다. 일탈과 같은 여행지에서의 만남, 예정된 헤어짐, 기약하지 않은 미래. 그러나 마음은 시작된다. 이어질 삶이 시작된다. '비포 선셋'은 이미 끝난 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의 시작이 끝났다고 여겨질 긴 시간 이후, 시작이다. 시작됨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끝나도 된다는 이해 속에서 끝나지 않은 시작을 보여준다.
살면서 여러 가정 중에 우리가 가장 쉽게 하는 가정은 '끝'이다.
잘 될 것이다, 시작된 것이다 등과 같은 열려 있는 긍정과 시작에 대한 가정은 잘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이제 다 했다 등과 같은 끝에 대한 가정은 잘 내린다. 마음을 닫고, 하던 일의 매듭을 짓고 또는 한 발 물러서고, 그만한다 손 털고. 비포 시리즈를 다 보고 난 후 내가 느낀 하나의 키워드는 '시작'이었다. 어디서든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 확정된 매듭, 타오르는 불화 속에서도 우리는 '시작'을 노래할 수 있다.
# 세 커플
제시와 셀린은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한 세 커플이 있다. 세 커플은 각자의 관계와 언어로 삶과 사랑, 관계에 대해 말한다. 제시와 셀린도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다르 듯 비슷하고, 비슷한 듯 다른 네 커플의 이야기는. 제시와 셀린의 과거, 현재, 미래인가 싶었지만. 네 커플이 함께 식사를 할때 이건 직선의 시간 선상에 놓인 어느 지점들이 아니라. 현재성을 가진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셀린과 제시의 지금에는 젊은 커플의 시간도 있고, 서로 배우자를 잃고 친구인 듯 서로 의지하는 노년의 두 사람의 시간도 있다. 모든 것이 지금의 시간이고 지점인 것이다. 그래서 네 커플의 식사는 서로를 수용하고 경청한다. 좀 부러운 식사였다.
# 여자들, 남자들의 대화
그러니까, 네 커플의 식사 전에 각각 세 커플의 남/녀 대화가 따로 보여진다. 이제 시작하려는 젊은 커플을 제외한 세 커플의 여자들은 부엌에서 남자들은 야외 벤치에서. 그리스라는 여행지이지만, 각기 여행객 또 현지인 등과 같은 위치가 다르지만 남녀의 공간은 뻔해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여성학/남성학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를 본지 거의 한 달 이상 지나서 좀 가물가물 하지만. 여자들끼리 모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다와 남자들끼리 모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수다가 재밌고 솔직해 보였다. 감상만 남고 내용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영화를 한 번 더 봐야하나 싶다. 아님 영화를 보고 진작 적어둘걸.
# 미드나잇
제시와 셀린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지려 친구들이 마련해준 호텔로 간다. 그리고 역시 두 사람의 가장 큰 매력인 대화를 시작한다. 이것이 밀당의 정석인가 싶은 두 사람의 밀고 당기는 솔직한 대화는 정말 좋다. 내가 이런 대화를 잘 할 줄 몰라서 좋은 것인지, 이런 대화가 그리워서 좋은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선라이즈부터 미드나잇까지 제시와 셀린이 들려주는 대화가 나는 참 좋았다.
미드나잇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전보다 더 격렬해진다. 부부가 되어 살고 있는 삶이라 그런 것인가. 제시와 셀린 각자에게 고인 삶의 감정 때문인가.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제시와 셀린에게는 가정으로서 각자의 고민이 있고 또 본인으로서 각자의 고민이 있다. 서로 잘 들어주고 잘 소통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서로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호텔로 걸어가며 나눈 대화들, 호텔에서 격렬하게 토해내던 대화들 그리고 해질녘 야외 카페에서 다시 마주한 그들. 대화로 이루어진 그들이었지만 어쩐지 그 때에는 대화가 없었다. 아니 말로 된 대화가 없었다.
미드나잇에서는 셀린에게 주어진,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정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가는 한 사람의 고민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에 비해 그것을 너무 모르는(몰라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모르고 있었다.) 제시가 얄밉기도 했다. 그래서 더 절실한 현실 같았다. 한 사람의 문제는 본인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몰라준다고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시와 셀린이 호텔에서 싸울 때 내내 이대로 둘이 헤어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의 결말 예상은 이대로 둘이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셀린은 호텔 근처 바닷가 카페에 있었고, 제시는 익숙한 듯 셀린을 찾아간다. 두 사람은 아직 헤어질 사이는 아닌가보다. 그 장면에서 나는 다시 앞서 네 커플이 식사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젠가 헤어질테고 그러니까 사랑해야 하고.
비포 선라이즈부터 두 사람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장면에서 다시 시작했다. 시작하는 것이 사랑인가보다, 어느 때 어디서든 시작하는 것이.
비포 시리즈 대본집을 갖고 싶다는 한 줄 감상으로,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마친다.
'리뷰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최애픽, 이야기의 힘 (0) | 2020.05.30 |
---|---|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지금을 향해 갈 것이다 (0) | 2020.05.30 |
[비포 선셋] my heart will stay yours (0) | 2020.05.06 |
[비포선라이즈] 그대는 나를, 난 그대를 이끄네 (2) | 2020.04.21 |
[소공녀] 너만 있으면 충분해 (0) | 2020.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