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하도 온 동네 뛰어놀아서 모르는 풀과 꽃, 나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대부분은 열매를 맺거나 꽃이 피는 풀과 나무 외에는 잘 알지 못했다. 내 눈에 띄고 아는 것만 알았던 것이다.
자주 얘기했듯 유년 시절의 나는 알아주는 골목대장이었다. 같은 동에서도 라인에 따라 서로 패거리를 삼던 때였는데. 우리 라인의 동생이 옆 라인의 오빠에게 맞고 왔다는 얘기에 바로 쫓아가 발차기 한 방 날리고 왔을 정도였다. 지금에서야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사실 엄청 무서웠다. 겁이 많아서 내가 맞으면 어떡하지, 걱정이 들었는데. 나를 따라오는 같은 라인의 아이들의 눈빛이 내게 힘을 줬던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발을 찼는데, 키만 멀대같이 큰 옆라인의 오빠는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서로 마음에는 겁이 났으면서 아닌 척 뻐기던 아주 어린 나이였다.
시영 아파트 동이 꽤 길었다. 층은 5층뿐이었는데, 1호부터 6호까지였고, 우리 집은 5, 6호 라인이었다. 놀이터는 옆으로 13동까지 지나야 저 끝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먼 길은 아니었지만 키가 작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엄청나게 먼 거리였다. 또한 내가 살던 14동 앞에는 아파트 상가가 있었는데, 그 상가 뒤편을 지나 놀이터까지 가는 길은 어린 내가 느끼기에는 외진 길이었다. 불량한 중학교생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여럿이 모여서 놀이터로 갔다. 지금과 달리 모래가 잔뜩 있던 놀이터는 넓고 놀이기구는 충분했다.
어느 날인가 혼자 놀이터로 가게 되었다. 모두가 이미 놀이터에 가 있었고, 나도 얼른 놀이터로 가서 놀고 싶은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지금도 가끔 그러하지만, 그때도 뛰면서 내 팔 높이의 키 작은 관상수 위로 손을 스쳤다. 그리고 지금껏 모르던 풀을 만나게 되었다. 박하와 깻잎! 손으로 흔들어 스치면 향이 코까지 스쳤다. 손바닥에는 박하향이 깻잎 향이 가득했다. 먹을 수 있는 열매, 눈으로 보기 예쁜 꽃 그리고 향기. 나는 이것 외에 가지와 풀에는 집중한 적이 없었는데. 잎사귀에서 이런 냄새가 나다니! 나는 놀이터로 뛰어가던 걸음을 다시 집으로 내달렸다.
엄마를 찾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와는 달리 엄마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어릴 적 소 등에 타고, 학교 다녀오면 가방을 던져두고 소풀 먹이러 끌고 풀밭에 가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는 뒷밭에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 당시 엄마는 모든 면에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엄마의 대답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깻잎은 깻잎이 맞았고, 박하향이 나는 잎은 엄마도 모르는 것이었다. 박하사탕과 같은 향이 나는 그 잎이 너무 좋아서 놀이터 가는 것도 잊고, 잎을 내내 뒤흔들었다. 향이 가득 났고 또 잎을 따고 코밑에 끼워두고 맡아댔다. 꽃향기와도 달랐고, 소꿉놀이를 하며 잎사귀를 빻은 냄새와도 달랐다.
새로운 자극에 나는 흠뻑 빠져버린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의 집중은 오래가지 않듯이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그 후로 버릇이 생겼다면, 놀이터를 갈 때는 꼭 박하 잎사귀 위로 손을 뻗어 잎을 흔들었다. 박하향이 놀이터로 가는 길을 향긋하게 해 주었다. 지금도 그 나무가 박하 나무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그 향은 아직도 손바닥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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