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주로 계절과 함께 온다. 나는 한때 회사 점심시간마다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그리고 산책하며 그곳에서 만나는 꽃마다 번호를 붙여 주었다. 1번 봄꽃은 산수유, 2번 봄꽃은 목련, 3번 봄꽃은 개나리와 진달래가 앞다투어 피어났다. 그리고 벚꽃이 피었다.
해마다 봄이면 전국 곳곳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 사실 벚꽃이 예쁘다는 생각을 그리 하지 못했다. 꽃 축제에 가면 사람만 많지 정작 꽃은 제대로 볼 수도 없어서, 그다지 흥미를 갖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며 마치 순번을 잊지 않았다는 듯 차례차례 피어나는 꽃들의 순서가 나는 더 흥미로웠다.
직장을 다니면 결국 나인 투 식스,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정해진 시간 동안 건물에 갇혀 있어야 한다. 사무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는 게 나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일이 힘든 것도, 사람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건물에 갇혀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게 나는 제일 힘들었다. 그러다가 허리디스크가 심하게 왔고, 나는 치료를 위해서라도 많이 자주 걸어야 했다. 그래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짬을 내어 회사 근처 공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이런다고 허리가 나아질까 싶었는데, 의외로 허리보다 내 마음이 먼저 나아졌다.
천만다행으로 회사 근처에는 몇 걸음 떼지 않고 바로 큰 공원이 있다. 공원 입구가 멀어서 들어가진 못하고 공원 담장을 따라 둘레만 걸어도 충분히 좋은 산책 효과를 주었다. 공원 둘레를 걷다가, 빌딩 숲 뒤편 빌라촌 사이 골목을 걷다가. 나만의 산책 코스가 생기고 산책 코스를 따라 나만의 명소가 생기기 시작했다. 모과가 열리는 오피스텔 뒷마당, 장미가 담을 뒤덮는 아파트 담장, 라일락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피는 주택, 그리고 벚나무가 울창한 두 곳의 명소.
벚꽃이 필 시기가 되면 일부러 두 명소 근처로는 가지 않는다. 벚꽃 몽우리가 올라오고 꽃잎을 쭉쭉 뻗기 시작하는 모습보다는 만개하고 휘날리는 모습을, 그 장면만을 만끽하고 싶어서 일부러 멀리서 꽃이 어느 정도 피었나 만 관망 하며 지나간다. 그러다 꽃이 만개하면 그때부터 나의 산책코스는 두 장소를 오가는 것이 된다.
하나는 공원 담장길이다. 공원에는 큰 능이 있고, 능 곁으로 울창한 벚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크기도 엄청나서, 살면서 여태 본 벚나무 중에 제일 큰 것들인 것 같다. 그래서 꽃도 저~ 위에. 건물 3층 정도 높이쯤에 있다. 그 꽃을 보려면 한껏 고개를 치켜올려야 하는데 그러면 하늘과 정오의 내리쬐는 햇빛이 함께 아른거린다. 그 순간이 좋아서 벚꽃이 피고 지는 짧은 시기 놓치지 않으려고 자주 가고 또 갈 때마다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또 하나는 어느 회사 뒷담을 따라 심긴 벚나무이다. 이건 일반적인 벚나무 크기이다. 담장을 넘어 뻗은 가지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어내고. 이 벚나무는 꽃잎이 휘날리기도 하지만, 꽃 채로 똑 떨어진다. 그래서 바닥에는 온전한 모양의 꽃들이 떨어져 있다. 그리고 자주 이 벚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벚꽃잎을 받았다. 떨어지는 꽃잎을 받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내가 받은 꽃잎의 사랑이 다 이루어지려면 나는 몇 번의 연애를 더 해야 한다. 꽃 채 똑 떨어진 것을 주워 담장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어댄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매년 봄이면 매년 같은 곳에서 매번 같은 벚꽃을 보는데도, 나는 매번 새로움에 감탄한다. 작년에 본 거잖아, 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는. 매일의 꽃이 같지 않고 매일의 바람과 해가 같지 않다. 그리고 봄이면 밀려드는 울적함은, 벚꽃과 함께 한 점심 산책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것은 내 근속 직장 생활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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