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나는 꽤 말괄량이 골목대장이었다. 내가 살던 시영아파트에는 1층, 2층, 3층으로 나와 동갑내기 한 명씩 있었고, 그 자매들(형제는 없이 모두 자매만 있는 세 집이 나란히 1, 2, 3층에 있었다.)과 아파트 옆 라인의 아이들 몇 이렇게 매일 어울려 놀았다. 시영 아파트 화단은 넓었고 단지는 크고 우리가 마음껏 뛰어놀고도 넉넉했다.
뒷 화단으로 앞 화단으로, 지하실로 옥상으로 또 아파트 상가에서도 지하의 슈퍼부터 3층 목욕탕 위 상가 옥상까지. 온 동네 다니지 않는 곳 없이 샅샅이 놀며 다녔다. 아파트 단지는 넓었으나 놀이터는 두 개뿐이었고, 두 놀이터는 내가 사는 동에서 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14동 주변에서만 뛰어놀았던 것이다. 화단에 심긴 수많은 풀과 나무, 꽃은 신나는 놀잇감이었다. 그중에서도 화단에 낮게 자리한 분꽃. 가장 흔하고 가장 친근한 유년의 꽃이다.
분꽃만큼 유용한 놀잇감이 없었다. 소꿉놀이를 할 때면 꽃과 잎을 각각 빻아서 색을 내어 음식을 차리고. 까맣게 익은 씨를 가르면 하얀 속 알맹이가 나오는데, 이걸 얼굴에 바르면 하얗게 묻어났다. 어른을 흉내 내며 화장하듯 바르곤 했다. 또 꽃을 잘 따면 꽁지에 수술과 이어진 동그란 알이 있는데. 아마도 이건 꽃이 지나고 나서 단단한 껍질의 씨앗이 되는 것 같다. 꽃에 이어진 동그란 것을 살살 떼어내면 수술이 몇 개 붙은 상태로 꽃에서 떨어지고 그러면 수술이 꽃의 좁은 끝 관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다. 그러면 그 동그란 것을 귓구멍에 살짝 걸친다. 그리고 달랑달랑 귀걸이라 뽐내는 것이다. 그것만큼 예쁜 귀걸이는 없었다.
게다가 분꽃은 꽃의 색깔도 다양했다. 분홍색, 노란색이 가장 흔했고 흰색 또는 색이 섞인 얼룩 꽃도 있었다. 흰꽃은 드물어서 발견하면 네 잎 클로버를 찾은 듯 기뻤다. 이제 시간이 흘러 분꽃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어른이 된 내가 분꽃이 많은 곳에 더 이상 가지 않은 것인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느 날인가 어느 곳에서 분꽃을 보고 반가워 고스란히 떨어진 꽃 하나를 땅바닥에서 주워 그 옛날처럼 뒤끝의 동그란 알을 살살 떼 보았다. 꽃술이 연결된 채로 쏙 떨어졌다. 신이 나서 대롱대롱 꽃을 흔들어 봤지만,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귀에 걸어도 같이 보아줄 친구가 없었다. 어릴 적에는 집 밖으로 나오면 늘 친구와 함께였다. 나는 분꽃을 귀에 걸지 않았다. 최대한 그대로 꽃을 만들어 떨어져 있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두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시영 아파트 14동 입구에는 낮은 화단 담을 따라 분꽃이 꽤 길게 심겨 있었다. 초록빛 잎과 분홍색, 노란색 꽃이 만발하면 그 앞 인도에 주저앉아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딴 데 가서 놀라는 어른들의 핀잔이 이어지면 우리는 뒷 화단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도 분꽃이 있었고, 우리들은 더 넓은 집을 가진 양 소꿉놀이를 다시 시작했다.
나팔을 닮은 분꽃 귀걸이를 다시 귀에 걸어볼 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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