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대학의 단과대학 건물은 잔디밭이 넓었다. 캠퍼스 자체도 넓긴 했지만, 특히 예술대학 잔디밭은 건물 앞으로 뒤로 건물과 건물 사이로 꽤 넓었다. 신입생이던 그때에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잔디밭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첫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 잔디밭에 참 자주 있었다. 아직 낯가리던 새내기 시절, 수업이 끝나면 어디에 가 있어야 할지 방황하던 시간이었다. 과방이나 자료실 등은 낯설어 들어가기 쑥스럽고, 도서관에 가자니 날씨가 너무 좋던 봄이었다. 그때에 나는 힙합 음악을 좋아했다. 가사와 가수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여타의 노래와 달리, 힙합이나 랩은 (나에게는) 가사를 이루는 발음과 가수의 목소리 또한 하나의 악기가 되어 다른 리듬과 함께 노래를 구성하는 요소로 어우러지는 게 좋았다. 돋보이려고 하는 소리 없이 다 비슷한 톤으로 뭉개지는 분위기가 좋았던 것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나는 사실 억울하고 불편한 거 하나 없었으면서, 괜스레 이런 반항의 노래를 귀에 꽂고 다녔다.
당시 유행하는 펑퍼짐한 힙합 바지에 줄무늬 티를 입고 어깨를 가로지르는 크로스백을 맨 나는 공강 시간이면 종종 잔디밭에 앉아있었다. 어릴 적 아파트 잔디밭에서 뒹굴던 기억이 있어서 잔디밭에 있는 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새내기였던 때에는 아직 그 잔디밭에 벤치가 없었다. 벤치는 일이 년 지나고야 생겼다.
한 번은 그 잔디밭에 엎드려 잡지를 보고 있었다. 어느 기획사에서 발행한 힙합 잡지였다. 사실 매일 보는 것도 아니고, 서점에 갔다가 무가지로 꽂혀 있는 것을 그냥 들고 온 것이었다. 그날따라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무슨 내용인가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동기가 그날의 내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뚱한 표정으로 힙합 잡지를 읽고 있는 조용한 사람. 그러나 실상은 공강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잡지 또한 눈에 읽히지 않아 뒤적이고 있었을 뿐이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핑퐁 오가는 대화를 잘 따라잡지 못해서 입을 닫았을 뿐인, 싱거운 사람이다. 조용하거나 싱겁거나 같은 말이려나.
그 시절 나는 내가 못하는 것을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충실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러나 살면서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는가. 한 해 한 해 지나며 나의 옷차림은 단정해지고 때에 따라서 사회적 눈웃음도 능숙해지고, 더 이상 잔디밭에 그냥 앉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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