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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땅부터 오는 봄(002)

by 혜.리영 2021. 3. 23.


나에게 점심시간이란 광합성의 시간이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니 점심시간 만큼은 방해 받지 않고 내 맘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너무 당연한 명제가 때로 직장인에게는 당연하지 않기도 하다. 입사하고 한동안은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으나, 나에게는 햇볕이 필요했다. 과감히 점심을 간소화하고 근처 걷기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히 회사 근처에는 큰 공원이 하나 있고 짧은 점심시간에 공원 둘레를 천천히 걷다 돌아오기 충분했다.

잠시지만 회사를 벗어나 혼자 걸으며 낮볕을 쬐는 시간은 복잡하던 머리 속을 나른하게 해주어, 오후 근무 효율도 높여주었다. 그렇게 나는 점심 걷기파가 된 것이다. 요즘 같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때면 볕이 강해져서 선글라스를 챙겨다닌다. 선글라스까지 장착했으니 이제 나른한 걸음으로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공원은 꽤 커서 점심시간에 그 안에 들어가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계절은 늘 담장 안에 있다. 요즘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시작하면 바짝 마른 나뭇가지가 통통하게 차오르는 것이 보인다. 잎을 틔울 준비를 하고 또 꽃봉오리도 봉긋 솟아올릴 준비를 한다. 나무들이 그렇게 봄맞이 한창인 초봄에, 벌써 봄은 와 있다.

걷다보면 자연스레 담장 안 얕트막한 언덕을 보게 된다. 생명은 없는 듯 누런 잔디만 있던 그곳이 봄이 시작되면, 아니 아직 모두가 겨울이라고 말하는 때부터 혼자 봄을 불러낸다. 공원 바닥 잔디가 푸릇푸릇 솟아오르고, 들풀과 이름 모를 낮은 봄나물들이 다 피어나고 나면 그제야 나무들이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어제는 그동안 춥다고 나가지 않던 산책을 오랫만에 나갔다. 이제야 나왔냐고, 봄이 타박하는 듯 볕은 따가웠고 바람은 코끝에 살랑였다. 코끝에 낚시 바늘이라도 걸린 듯 발걸음을 붕 뜨게 만들어주는 바람이다. 그렇게 까치발을 딪듯 걸음걸음 걷다보면 담장 안은 봄이 가득하다. 햇볓이 통통하게 봄이 차오른 나무의 그림자를 바닥에 늘어뜨리고. 바닥에는 갖은 봄들풀들이 퐁퐁 솟아 활짝 피어있다.

봄은 땅에서부터 온다. 언 땅이 녹고 웅크린 풀들이 피어나면 봄은 할일을 마쳤다는 듯 바람을 타고 구석구석 다니고 간다. 그러니까 봄바람이 불면 봄이 지나가는 중인 거다. 땅부터 올라오는 봄을 알아차리고부터는 늦겨울, 아직은 꽃샘추위가 기승일 때 물렁한 땅만 보고 다닌다. 땅부터 솟아오는 봄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려고.

올해는 예년보다 더 춥게 느껴져 산책도 자주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봄은 와야할 때에 어김없이 와 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아도, 꽃샘이 기승을 부려도, 마음이 아직 꽁꽁 얼었어도. 봄은 온다. 어김없이 땅부터 솟아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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