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매일 무언가 쓰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첫줄도 나쁘지 않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십년은 어린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가슴 설레어 했다. 사실 이것은 별일이 아니다. 서른일곱, 십년 이렇게 횟수를 세어 무언가를 꼽아보는 것은 엄청난 위화감을 주니까. 어제 쓴 글을 페이스북에 올릴까 생각하며 페북 앱을 열었다. 주말 밤 ‘비긴어게인’이 막 끝난 시간이었나보다. 페북에는 이소라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포스팅들이 올라왔다. 혁오와 이소라 사이, 나는 아직 이소라의 노랫말에 닿지 않았다. 닿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나는 감성적이다. 그리고 감상적이다. 생각하길 좋아하고, 무언갈 느끼고 그것을 곱씹어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한 번 꽂힌 영화는 서너 번도 되보고, 책도 한 작가에게 꽂히면 그 작가의 책만 찾아 읽는다. 그만큼 나의 관심은 빨리 식기도 한다. 나의 감성은 유난스러운 것이어서 이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한다. 타인과 어떤 화두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런 경험을 한다.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닌데. 당신이 이해했다고, 공감한다고 말하는 그게 아니라. 아주 미묘하게 다른, 작은 차이가 있는 건데. 그러나 그 정도는 모두의 +, - 오차 범위라는 것이다. 그 오차범위가 바로 내가 말한 것의 핵심인데 말이다. 나의 핵심은 늘 오차범위이다.
며칠 전 같은 팀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먹다가, 각자의 씀씀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기를 듣다가 몇 년 전 크게 아프며 사고방식이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겪고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는 얘기였다. 밥 먹으며 오가는 대화라 긴말 붙이지 못하고 이 정도 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람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지금의 나를 위해 맘껏 쓰고 살자는 얘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말하고자 한 건 아닌데. 그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르게 이해해 했다는 것을 알까? 아니면 이건 대화마다 겪을 수 밖에 없는 나의 오차범위인가.
한때 이소라 노래를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소라 노래를 듣기가 힘들어졌다. 음악에서 느껴지는 이소라의 예민함이, 거미줄에 앉은 먼지 한 톨 치워야 하는 듯한 예민함이. 나는 버겁고 힘들어 졌던 것 같다. 숨소리마저도 완벽히 셋팅 되어야 하는 듯 느껴지는 이소라의 노래를 듣고 싶지 않았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그건 너무 힘든 일이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다. 지금의 이소라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때의 이소라 노래는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였던가는 알 수 없다. 기억은 지워졌으니......
삶의 오차범위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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