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무슨 생각인가 당황스러웠다. 몇 해 전 나는 이제 글쓰지 않을 거라고, 책도 읽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유난스럽게 주문을 걸었는데. 이제는 쓰고 싶다니.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때가 되면 집에 돌아가야 하듯이.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저무는 횡단보도 앞에서.
변덕이 심해 꾸준히 하는 일을 잘 못한다. 그런데 엉덩이는 무거워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은 잘한다. 그래서 여태 직장을 잘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엉덩이가 무거워서. 여하튼, 어릴 적 피아노도 배우다 말고, 미술도 배우다 말았다. 그나마 미술은 중학교 때까지 학원에 다녔으니 오래 했다. 느닷없는 선택으로 글을 쓰면서. 칭찬도 받고 상도 받고 관심도 받고. 무엇보다 내가 즐거웠다. 친구들에게 팬픽을 써 줄 때도, 백일장 글을 쓸 때도. 어떤 글을 쓰든 글을 쓸 때 제일 신났다.
나는 생각이 느리다. 깨달음도 늦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도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은 편했다. 툭 치면 톡 나와야 하는 유난스런 수다가 아니라서. 한 문장을 쓰기 전에 곰곰이 머리 속에서 되새겨 볼 수 있어서. 글쓰기를 더 재밌어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밤을 새며, 글 쓰기가 너무 좋아서 안달나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남는 시간에 쓰고, 쓸 만한 것을 생각해서 잘 굴려보다가 됐다 싶을 때 쓰고. 되면 쓰고 아니면 안 쓰고 였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으니, 독서를 많이 하거나 사유가 깊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생각날 때 했을 뿐이었다. 글을 쓰는 게 좋았고 생각이 날 때마다 썼다. 고3 때 단편 쓰기에 어느 정도 감을 잡고는 공장처럼 소설을 써냈다. 머리 속에서 너무 재밌는 얘기들이 떠올라서 안 쓸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 는 생각에서 시작한 글은 지난 날 내가 얼마나 글쓰기를 즐거워 했는지 돌아보는 내용이 되었다. 아마도 요 몇 년 그마저도 잊어버려서겠지. 글을 쓰지 않을 거라는 유난스런 주문 이후 나는 내내 뭔가 빼먹은 듯한 시간을 살았던 것 같다. 어디에 중요한 것을 놓고 온 것 같은데. 놓고 온 것 조차도 잊어버린 기분. 알 수 없는 상실감만 남은 지난 시간이 내 삶에 어떤 시간이었을까.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지 않았을까.
이렇게 하루하루 아무 준비 없이 쓰는 짧은 글이 그 시간을 알려주는, 답을 주는 길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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