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아파트는 화단이 넓었다. 단지도 넓었고, 5층짜리 동과 동 사이 간격도 넓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가 컸던 것이 아니라 내가 작았던 것이다. 내 유년을 고스란히 가진 시영아파트는 내가 스무 살 때 재건축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는 훨씬 높은 층을 가진 새 아파트가 들어선지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아파트 단지가 좁아진 것은 아닌데, 어릴 적 기억보다 훨씬 좁고 답답한 기분이다. 아마도 내가 컸기 때문인 것 같다.
어린 내가 거의 동네 화단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따 먹으며 놀았지만 유일하게 먹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복숭아이다. 14동과 13동 사이 넓은 공터가 있는데, 그 공터에는 인도 가까이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뒷 화단에 가까이 있지도 않고, 혼자 덩그러니 인도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5월에 접어들 무렵이면 작고 단단한 열매를 맺던 복숭아나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이 나무에 대해 수수께끼 혹은 스무고개를 하듯이 알아갔다. 누군가 처음부터 저건 개복숭아라서 못 먹어,라고 해줬더라면 좋았을까.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면 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건 무슨 나무인지 물었더니 복숭아 나무라고 알려줬다. 맨날 동네에서 손톱만 한 빨간 앵두 또는 사루비아 꽃 꽁지의 단물, 아삭한 대추 등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던 나와 동네 아이들이었기에. 저 열매가 복숭아라는 것은 큰 화제였다. 시장에서나 보는 복숭아가 나무에 열려 있으니 얼마나 신기할까.
낮이고 밤이고 복숭아가 여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몰라도 아직 초록빛인 저 상태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 호기심에 땅에 떨어진 것을 한 번 깨물었다가 그 떫은맛에 퉤퉤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기다리면 어린 내 주먹만 한 작고 푸릇한 복숭아 열매가 익어 맛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다가 하룻밤이면 나무의 열매가 싹 사라졌다. 땅에 떨어진 것도 없고, 열매가 다 익었던 것도 아닌데. 감쪽같이 하룻밤이면 다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주변에 물어보길 잘 못한다. 복숭아가 어떻게 된 건지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나는 복숭아나무의 신비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더 지나 그건 못 먹는 개복숭아 나무였고 열매가 나무의 생장에 방해가 되어 다 여물기 전에 경비 아저씨가 모두 거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복숭아나무의 열매는 내게 신비로 남아 있다.
복숭아나무는 푸릇한 열매들을 불러 모아 가야 할 곳을 알려줬다.
너는 높은 곳에 혼자 달려 외로운 감나무의 감에게 가렴.
저기 왁자지껄 아웅다웅 다툼이 끊이지 않는 앵두나무 앵두들에게는 네가 가고.
박하향이 날 때가 됐는데 늦어지니, 박하잎들 위로 한 바퀴 구르고 오렴.
너희 일이 다 끝나면 그대로 땅의 품으로 들어가 쉬어라.
쉬고 일어나면 다시 태어나 인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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