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고 자란 서울 변두리의 시영 아파트는 유난히 화단이 많았다. 특히 내가 살았던 14동은 넓은 단지 외곽에 자리해서 아파트 건물 뒤로는 담벼락과 같은 비탈진 길을 깎아 벽을 세운 어느 물류회사의 담벼락이 높다랗게 자리했다. 그래서 14동은 건물 뒤로 아지트 같은, 비밀스러워 보이는 뒷 화단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동과 동 사이가 넓었으며, 다른 동도 앞보다는 뒷 화단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앞으로는 아파트 출입구로 이어지는 인도가 있어서인지 내가 살았던 시영아파트는 유독 뒷 화단이 넓었다.
그리고 화단마다 과실나무가 참 많았다. 복숭아나무는 열매가 푸릇하게 열리면 다 영글지 못하고 하룻밤 새 다 사라졌다. 어른이 되어서야 경비 아저씨가 다 따갔다는 것을 알았다. 개복숭아 나무였고, 열매를 맺으면 관리가 어려워서였다 나. 어른이 되어 엄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다. 그리고 앵두나무도 있었다. 앵두나무는 생각보다 크고 꽃다발 같이 생겼다. 어릴 땐 그게 앵두나무인 줄 몰랐다. 하얗게 열매가 생기고 푸르스름 연둣빛으로 익어가다 빠알갛게 여물면 가차 없이 따먹었다. 하굣길에 나무에 찰싹 붙어 어린 내 키에 닿는 열매는 모조리 땄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이 다 그랬다. 아마도 유일하게 과실을 맛볼 수 있는 나무여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빨갛게 익은 열매는 달진 않지만 뭔가 과육이 느껴져 먹을 만했다.
서울내기 아파트살이에 한 동네 친구들이란, 넓은 아파트 단지에서 같은 동 또는 옆 동에 살아서 자주 보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앵두가 영글면 한 줌씩 열매를 따서 뒷밭에 가서 놀았다. 우리는 뒷 화단을 뒷밭이라고 불렀다. 거기에는 계절마다 재미난 것이 많았다. 때로는 불량한 언니 오빠들이 와서 우리는 눈치만 보다가 바로 앞 상가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아파트 화단은 꽤나 좋은 놀이터였다.
게다가 앵두나무처럼 맘껏 먹을 수 있는 간식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이 앵두나무 서리(?)에도 난관이 있었다. 바로 우리 할머니와 윗집 아저씨였다. 동네에 무서운 어른이 한둘은 있게 마련이다. 그 무서운 어른이 바로 우리 할머니와 윗집 아저씨였다. 우리가 우르르 뛰어다니며 사고 치거나 위험하지 않게 지켜주는 방식으로 혼을 자주 냈다. 이놈들!! 하고 말이다. 앵두나무에서 열매를 딸 때도 그랬다. 아마 먼지 쌓이고 다 여물지도 않은 거 먹고 배탈 날까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 그래서 우리는 늘 어디선가 ‘이놈들!’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놀았다. 맘껏 놀아도 늘 우리를 봐주는 어른이 있던 어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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