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답답하면 걸었다. 서울내기답게 토요일 오후 복잡하고 번잡한 명동을 이리저리 치이며 걸어다니고 오면 속이 풀렸던 것이다. 그때는 하교 후 그렇게 다니고도 기운이 남던 십 대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는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공원을 걸었고. 그렇게도 속이 풀리지 않는 날은 퇴근길 지하철 한두 정거장 쯤 걸었다.
어제도 속이 답답해, 집으로 가는 길에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 4층 규모의 거대한 마트는 아직은 쌀쌀한 밤바람을 피해 속 풀릴 만큼 걷기 좋은 곳이다. 마트에 들어서며 뭐든 눈에 들어오는 건 다 사겠다는 심사였다. 열심히 걷거나 또는 뭐든 사야 속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었다. 어떤 품목을 봐도 시큰둥했다. 저녁거라라도 근사한 걸 살까 싶었지만. 요즘 유행한다는 대형 딸기도, 좋아하는 고기나 생선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하나쯤 집어들었을 와인도 지나가고, 즉석식품도 냉동식품도 모두 마른 모래처럼 건조하게 보였다.
내 눈이 멈춘 곳은 매대였다. 진열코너와 코너 사이에 쌓아놓은 김더미. 카카오 프랜즈와 협업한 김세트가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야무지게 포장된 비닐 안에는, 접이식 라이언 장바구니가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마트의 빈 장바구니만 들고 구경만 다니고 있었으면서. 마치 뭐라도 사담아야 겠다는 다짐처럼 김세트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것만 사더라도 접이식 장바구니에 김을 넣어 가야겠다 생각하며.
가심비, 접이식 장바구니가 없어서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평소 라이언 관련 굿즈를 사 모으는 편도 아니었다. 라이언을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평균 가격보다 비싼 굿즈 제품을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라이언 장바구니를 사면 김을 준대,와 같은 가심비를 건드리는 상품에는 깜빡 넘어가고 만다.
라이언 장바구니가 든 김세트를 골라 담아드니, 벌써 마음을 꽉 묶고 있던 매듭이 느슨해진 것 같았다. 내일 이 매듭이 다시 꽉 묶여지더라도, 이 순간은 라이언 장바구니로 인해 바늘구멍만한 숨통이 트인 것이다. 봄인 줄 알았는데 아직은 쌀쌀한 밤에, 김세트가 든 라이언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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