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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칠흑같은 밤(041)

by 혜.리영 2021. 5. 1.


기억하고 싶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 하루였다.

# 좌석 03번
서울을 벗어날 때면 나는 늘 03번 좌석을 예매한다. 앞 창이 탁 트여있어서 거침없고 속이 후련하기 때문이다. 특히 강원도 쪽을 갈 때는 구비구비 꺽이는 길마다 또 연달아 지나가는 터널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같은 후련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덕에 내 속도 많이 풀린다.

# 비
서울을 떠나 여행을 갈 때 고려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날씨이다. 맑은 날 가면 더없이 좋겠지만, 흐리거나 눈, 비가 몰아치는 날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몸고생이 있다) 예정된 여행날 예보는 100% 비였다. 쉼을 위해 가는 길이니, 돌아다니지 말고 숙소에 콕 박혀 있다가 와야지 싶었는데. 웬걸, 비가 오지 않았다. 보슬비 정도로만 오고 흐린 날 정도였다. 그럼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는 또 지도 검색을 하며 한곳이라도 더 가볼 곳이 없나 찾기 바빴다. 그러나 기껏해야 간 곳은, 자주 가지 않았던 청초호 반대편 공원 정도였다.

# 숙소 찾아 걷는 길
한 놈만 패, 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면 그곳만 주구장창 가는 편이다. 작년에 한 번 가보고 마음에 쏙 들었던 숙소를 이번에도 어렵사리 예약했다. 그사이 인기(?)가 많아져 주말 예약은 한달 새로 꽉 차 있었다. 요즘 보기 드믄 1인 숙소였다. 산속에 자리한. 여튼,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 초행길이 아닌 덕에 익숙한 길을 쉬엄쉬엄 가던 길이었다. 아직 펴 있는 겹벚꽃도 찍으며. 그때 집안일을 보던 동네 주민 분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다. 그분은 대뜸 '어디가요?' '저기 위쪽 숙소 예약해서 가는 길이예요' '길 잃어 버렸어요?' 'ㅎㅎㅎ 아니요. 천천히 가는 길이예요' '모르는가, 알려줄려고 했지~' 그리고는 댁으로 들어갔다. 사실 길이 복잡할 것도 없는 몇 가구 있는 동네였다. 그런데도 외지인이 길을 잃었을까봐 물어보는 마음이란. 나는 자주 감동하고, 작은 것에 찡- 한다. 주민분의 호의에 대뜸 마음이 즐거워졌다. 서울에서 낯선이는 경계의 대상인데, 이곳에서는 호의의 대상이다. (어디까지나 여행객 마음 필터로 걸러진 시선이다)

# 어린왕자
이번 여행은 숙소에 짱박혀 책 한 권 다 읽을 심산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식사를 하고 근처 서점으로 갔다. 속초에 오면 종종 가는 서점이다. 이 책 저책 뒤적이다가 짧지만 '어린왕자'에 대해 얘기하는 책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나의 흥미를 확 끌어당기는 제목이라니. 책을 살 계획이 없었는데 덥석 사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에 남은 시간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사길 잘했다 생각했다. 나는 '내가 행복한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이번 여행이 그러했다. 내가 행복한 곳, 내가 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것이 바다였고, 산이었다.

# 문장
버스를 타면 일단 자기 바쁘다. 03번 좌석에 앉아도, 경치 구경은 잠깐이다. 시작도 하지 않은 여행이 뭐가 고단한지 단잠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다 휴게소 한 번 들리면 그대로 뜬 눈이 되어 머리 속에서 오만 문장이 만들어진다. 재작년에 터질 것 같이 힘든 마음을 안고 떠난 여행길에서는 떠오르는 문장을 하나둘 메모앱에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대로 흘러가게 두었다. 누구나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을 가진 신념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내가 지금 좋은 문장을 떠올렸다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아도 나는 또다시 충분히 그와 같은, 그에 버금가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잡아 기록하는데 급급하기 보다, 끊임없이 문장을 이어 생각하기를 한다. 낚시 바늘이 여러 개 달린 낚시대를 드리운 것처럼. 좋은 문장들이, 사유들이 줄줄이 엮여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조용한 산속, 오붓한 숙소에 자리를 잡고서도. 서울내기인 나는 칠흑같은 밤을 견디지 못했다. 작은 방에 놓인 옅은 불의 스탠드를 켜두고야 잠든 것이다. 칠흑같은 밤을 견디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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