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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오월에 대한 예의(043)

by 혜.리영 2021. 5. 3.


여유있는 하루가 여유로운 마음을 만든다. 뒤척임 없는 숙면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나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고 주일 미사를 드리러 나갔다. 미사 후 날씨가 너무 좋아 그대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집 근처 공원으로 걸었다. 선그라스를 챙겨온 참이라 걷기 좋았다. 어디까지 걸을까, 얼만큼 걸을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공공 텃밭 앞 정자에 앉았다. 바람이 나를 지나가게 두었고, 음악에 맞춰 발을 까딱였다. 활짝 드러눕고 싶었지만, 작은 수줍음이 머뭇거리게 했다.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쭉 뻗고 눈을 감았다. 생각도 없이 그저 바람에, 음악에 맞춰 발을 까딱일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절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크게 Buddha Birthday~라고 쓰여있다. 낯선듯 자연스러운, 정말 정확한 그 표현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사찰 앞을 지날 때면 꼭 잊지 않고 읽고 지나가는 문장이 있다. 사찰 입구 공지사항 등 안내문이 적힌 표지판 옆으로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자기 마음의 근본만이 얽키고 설킨 모든 것을 풀 수 있다' 진리는 맞닿아 있는 면이 많다. 내 마음의 근본을 읽을 수 있다면 조금더 편할 수 있을까. 답을 구할 수 없는 생각을 잠깐 해보며 다시 길을 걷는다.

그리고 공원 산책길마다 매번 다음에 와야지, 했던 식당에 들어갔다. 아담한 일식당이었다. 좋아하는 사케동 대신, 김치 돈가스 나베를 주문했다. 맑은 날 매콤하고 얼큰한 것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치 나베 위에 살포시 얹어 있을 줄 알았던 돈가스는 푹 절여져, 형체를 알 수 없게 흐물거렸다. 내가 원한 맛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떠랴. 생각만 하고 지나가던 곳을 와 봤으니 됐다. 이렇게 한 번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언젠가 이사가는 날까지 '그 식당 한 번 가볼걸'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날로 끝났던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범한 휴일 나는 동네 여행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와 뻗었던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햇볕을 만끽하지 않은 건 시작하는 오월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월에 대한 예의는 계속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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