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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파도(042)

by 혜.리영 2021. 5. 2.


혼자 가는 여행의 좋은 점은, 일정이 내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후두둑 빗소리에 새벽에 깨서 잠깐 뒤척이다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조식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뒹굴거리며 책을 읽었다. 체크아웃 후 일정이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예매 시간을 앞당길까 싶다가, 아무래도 서울로 빨리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어제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본 표지판이 생각났다. '설악동 성당 2km' 지도 검색을 하니 버스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걸어서는 45분 내외. 시간이 많아 걸어볼까 하다가, 설악 산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혹시나 길을 잃을까 싶어 버스 타기로 결정하고 숙소를 나섰다.

동네에는 어디나 목줄은 매었지만 집이 어딘지 모를 개가 하나씩 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인사를 나눈 개는 마치 에스코트 하듯 나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따라왔다. 여기저기 냄새도 맡고 영역표시도 하고, 남의 집 묶여있는 개가 짖으면 왕 소리 한 번 못하고 쪼르르 내 뒤로 오고.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도 근처를 왔다갔다 했다. 고마워 정류장까지 바래다 줘서.

예를 들면, 1번 버스를 타야하는데 같은 방면인 1-1번 버스를 탄 것이다. 지도로 보나 길은 하나 밖에 없어서 대충 맞겠지 싶었는데, 아뿔싸. 정거장 이름이 달랐다. 뒤늦게 지도를 보고 내릴 곳을 지나친 것을 알았다. 후딱 내려 다시 지도를 따라 걷는 길. 산이 있고, 계곡이 있었다. 계곡을 따라 조성된 걷기 길을 따라 걸었다. 뜻하지 않은 산책, 기분 좋게 지인에게 페이스톡을 걸었다. 서울 지하철 안에 있는 지인과, 설악 계곡물 곁을 걷고 있는 나. 내가 서울 지하철 안에서 여행 간 지인의 페이스톡을 받는다면, 눈물이 주룩 흐를 것 같다.

설악동 성당에 도착해서 보니.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여서 굳게 닫힌 성당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아 겉만 보고, 성모상에 인사 드리고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어떤 자매님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용기를 내어 쪼르르 따라 들어갔다. '여행 왔는데, 성당이 있어 와봤어요, 잠깐 기도하고 가도 될까요?' 자매님은 낯선이의 등장이 놀라지도 않으시고, 방역 체크와 방문일지 쓰고 들어가라고 안내해주었다.

성당은 고요했고, 소박했다. 유럽을 갈 때면 크고 웅장한 성당에 휘둥그레진다. 공간에 앞도되는 마음이 저절로 경외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내 마음의 트렌드로 소박한 성당에 더 끌리고 있다. 공소와 같은 작은 성당 말이다. 아주아주 어릴 적, 신발 벗고 들어가던 대성전 같은 그리움이지.

다음 속초 방문은 이곳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일정으로 맞춰 와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속초 시내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하루종일 비올까 걱정되어 못 가려던 외옹치 바다향기로 향했다. 흐린 날 바다에 가면 귀에 때려박히는 파도소리가 좋다. 나는 속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으면 화장실 청소를 한다. 샤워기 물을 최고수압으로 틀어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다. 흐린 날 바다에 오면, 화장실 청소로도 풀리지 않는 것이 터질듯 풀려버린다. 한 바퀴 걷고 돌아오는 길에, 정다운 지인에게 또 엄마에게 페이스톡을 걸었다.

어제는 검색으로 새로 알게 된 음식점, 카페만 갔다. 그런데 뭔가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점심으로는 좋아하는 식당으로 갔다. 가는 길이 멀고 멀어 고민했지만, 그래도 그곳만한 데가 없다 생각했다. 역시나 정답이다. 음식은 여전히 맛있었고, 포장할 요량으로 이 식당에서는 처음 주문해 본 오징어순대도 역시 맛있었다. 흐린 날이라, 파도소리에 깊은 속도 풀리고. 흐린 날이라, 우산 뒤집혀가며 찾아온 식당은 여전히 맛있어서 즐거워졌다.

(평소에 비하면) 여행이 단순해졌다. 다음은 더 단순하게 와야지.

버스가 서울로 들어서는 길, 멀리 보이는 롯데타워를 보며 징그럽다 생각이 들었다. 빼곡히 들어선 건물과 건물들이 갑갑해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진입하고 나면, 그저 내 일상이 돌아가는 곳일 뿐인데. 버스가 서울로 진입하려는 그 순간 나는 자꾸 구역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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