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속이 답답하면 전화 했다. 그러니까 자기 얘기 좀 들어달라고 싶으면 '저나해도돼' 라던가 '통화좀하자' 라던가 카톡을 보낸다. 늘 마음이 급한 엄마가 전화를 먼저 하지 않고 카톡부터 할 때는 얘기 좀 들어달라는 것이다. 상황이 되면 바로 전화를 하고 아니면 답장을 보낸다. 내가 통화가 가능할 때 말이다. 이런 일은 나에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나는 자주 얘기 좀 들어달라는 전화를 주변에서 받곤 한다.
나에게 어떤 재주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가 알 수 없지만.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 주변 친구들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아니면 나를 만나거나. 그들은 주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고민이거나, 답답하거나, 화가나는 등. 내용은 다르지만 결국 어딘가 풀어놓고 싶을 때 나를 찾는 것이다. 나는 대나무숲이 되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그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그리 힘을 들이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 한 쪽 귀는 상대에게 열어두고 다른 쪽 귀는 바깥으로 열어두었다. 그러면 쏟아지는 이야기가 나에게 머무르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 나갔다. 그리고 대부분 나에게 얘기하는 것들의 90% 아니 99%는 본인이 이미 실마리를 갖고 있는 얘기이다. 적당한 리액션과 적당한 되묻기 몇 번이면,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가니. 나로서는 그리 힘들이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고 매번 듣기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나에게도 이런 대나무숲 같은 친구가 있다. 우리는 분기별로 한 번씩 만나 그간의 안부를 전한다. 속 답답한 일도 있고, 화나는 일도 있고 재밌는 일, 좋은 일도 있다. 나는 그 친구와 얘기를 할 때는 두 귀를 모두 친구에게 열어둔다. 그렇게 해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친구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방적인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서로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고, 섣부른 판단이나 조언은 하지 않았다. 잘 듣고 넘길 뿐이었다. 그것은 참 좋은 대화였다.
그 친구 덕에 나는 힘든 시간, 억울했던 일, 답답했던 일 마음에 맺어두지 않고 잘 지나갈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친구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는 이전의 나처럼 그렇게 듣지 않는다. 어느 때부턴가 한 귀가 잘 열리지 않았다. 한 쪽 귀를 상대에게 열고, 한 쪽 귀는 바깥으로 열었는데. 그 바깥으로 열리는 귀가 자꾸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만남, 대화가 힘들어졌다. 또 그런 일로만 나를 찾는 이들을 하나둘 느껴가며 점점 나는 더 많이 소진되어 감을 느꼈다. 힘들 때만 나를 찾는 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나를 존중하는 이와 도구로만 생각한 이는 미묘하게 달랐고, 나는 이제 그 차이에 민감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엄마의 통화로 오랜만에 다시 친구와 건강한 대화를 나누던 시간이 떠올랐다. 엄마는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니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퇴근하자마자부터 시작한 통화는 조금 힘에 부쳤다. 이제는 퇴근을 하는데 에너지가 소모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엄마 하소연을 들어줬으니, 주말에 집에 가면 맛있는 거 해달라고 졸라야겠다. 여전히 나에게 '모먹고싶어' 물어보는 엄마에게 '이거 해줘' 하고 졸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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