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때 나의 좌우명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였다. '한때'라고 말한 것은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무언가 책임을 지고 큰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의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삽이 되기도 하고, 못이 되기도 하고 또는 크레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내가 쓰임이 없어 버려지는 조각이 되진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좌우명이었는데, 어느샌가 나의 쓸모를 내가 스스로 찾는 것을 느끼고 그만 두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이게 내 몫이 맞나 아닌가, 나의 쓸모가 이 정도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만 두었다. 좌우명 없이 공백으로 지내는 동안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말씀을 듣게 되어 요즘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속한 신앙 청년 단체 월회합에 수녀님이 참여하셔서 하신 말씀이었다. 수녀님의 본의와 내가 받아들인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참 소중한 말씀이었다. 수녀님은 몽당연필에 대해 말씀하시며, 하느님께서 쓰기 편한, 손에 익은 도구가 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띵~ 어디선가 정답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여태 내가 어떤 도구인가만 생각했다. 어떤 도구로 사용될지만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어떤 도구로 존재하는지만 생각했지, 내가 잘 쓰이는 도구가 되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잘 쓰이는 도구가 됐음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함께 하지 않는 모임에 참여하게 된 지인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나역시 도움이 필요할 때 생각나는 지인의 연락이라 더없이 좋았다. 서로가 서로를 찾을 수 있는, 잘 쓰이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좋았던 것이다.
나의 쓸모가 삐까뻔쩍하더라도 새제품이라 사람들 손에 익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서로 어울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손에 닳고 닳는 존재가 되면 나에게 묻은 손때가 더 보람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의 쓸모 보다 내가 잘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무엇이든 하느님 손에 익은 도구가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나를 그에 맞게 써 주실 것이다. 나의 쓸모는 하느님 손에 익은 도구, (수녀님 말씀을 흉내내어)몽당연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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