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하루였다. 바다를 가기로 날을 잡았지만 가지 못한 날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준비된 구멍인 하루였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고 채우려고만 했던 하루를 그냥 비웠다. 어차피 구멍난 하루니까, 구멍난 그대로 보내자.
동네 메밀 맛집이 있다. 이 동네에 이사온 몇 년 전부터 찾아놓고는 한 번 가질 못했다. 일요일은 문을 닫고, 토요일에는 늘 약속에 바빴다. 그러다 잊혀졌다.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규모가 큰 가게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리한 작은 점포인데, 메밀 맛으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가봐야지 싶던 마음을 챙겨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 피크 타임을 지나서인지 가게엔 사람이 없었다. 점심 시간을 넘긴 평일 낮은 이렇게 한가롭구나. 판메밀을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만두를 더 시킬까 말까 고민했다. 밥만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면 주문했을 것이다. 한두 점 먹고 남은 건 포장하면 되니까. 그러나 나의 일정은 점심 후 나른하게 카페 타임이어서 고민만 했다.
고민하는 사이 메밀이 나왔다. 찰진 면이 보기에도 윤이 났다. 나는 간 무와 쫑쫑 썬 파를 많이 넣는 것을 좋아한다. 듬뿍 넣고 메밀을 푹 담궈 먹는 것이다. 후루룩 먹다보니 벌써 한 덩이를 다 먹었다. 또 후루룩 먹다보니 또 한 덩이 다 먹었다. 메밀국수는 먹을 때마다 이걸로 배가 차겠어, 싶지만 배가 땅땅하게 찼다.
만족스러운 점심에 발걸음 가볍게 카페로 갔다. 가끔씩 가는 곳이다. 왜 가끔씩 가냐면 늘 사람이 많이 발길을 돌리기 일쑤인 곳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가끔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려 카페에 가는데, 갈 때마다 사람이 가득했다. 운이 좋으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평일 한 낮, 또 코로나 때문인지 카페는 한산했다. 목소리 높은 4인 두 무리 사이의 2인 석에 앉았다. 마땅한 자리가 거기 뿐이었다. 한 낮의 카페는 이렇구나. 커피와 빵은 여전히 맛있었고, 손님들의 수다는 컬투쇼를 내 앞뒤로 틀어놓은 것만 같았다. 적당한 카페 소음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잠깐씩 비가 후두둑 쏟아지다 그쳤고, 또깍또깍 썰은 빵은 하나 둘 금세 줏어 먹었다. 손님들은 들고 나고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몇 달 째 책갈피 진도를 나가지 못하던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잠시 창밖을 보다가, 저녁은 뭘 먹을까 생각했다. 점심에 먹은 메밀이 맛있지만 역시 흐린 날엔 칼칼한 것이 땡긴다. 카페를 나와 역시 좋아하는 국수집으로 갔다. 비빔국수 하나 포장해서 집으로 왔다.
바다에 갔으면, 눈여겨 둔 전시회를 갔으면, 동생을 만났으면. 또 다른 하루였겠지.
좋아하는 것들로 늘어지게 채우고도 하루가 남아 맨발 까딱이며 예능 재방송을 보며 마무리한 하루였다.
이런 구멍이라면 자주 나도 좋을 것 같은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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