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걸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쉽게 접하고 또 쉽게 눈에 띄는 꽃이 개나리이다. 나는 개나리를 보면 때 이른 2월의 봄과 할머니가 떠오른다. 어릴 적 시영아파트에 살았다. 단지가 넓고 아파트 동마다 화단이 넓게 자리해서 충분한 나무와 풀과 꽃을 보며 자랐다. 단지 화단마다 알음알음 김장독을 묻고, 미니 밭을 일구던 옛날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화단에 작은 밭을 일구며 소일거리를 했다. 할머니의 연례행사와 같은 소일거리가 있다. 아직 추위가 물러나지 않은 2월이면, 할머니는 동네 화단에서 개나리 가지를 꺾어와 온 집안에 화병을 만들어 곳곳에 두었다. 신발장 위, 거실 TV 옆, 식탁 위, 베란다 선반에. 놓을 수 있는 곳에는 죄다 앙상한 개나리 가지가 담긴 화병을 하나씩 올려두었다.
앙상한 개나리 가지는 꼭 회초리 같고 또 기다란 말린 오징어 다리 같았다. 할머니는 때가 되면 밖에서 알아서 꽃을 피울 가지를 매년 이르게 꺾어 집안에 두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지.
집안은 당연히 바깥보다 따뜻했고, 물이 담긴 화병에 꽂아둔 개나리 가지는 신기하게도 곧 꽃을 피웠다. 앙상한 가지에 꽃이 먼저 피는 개나리. 할머니가 개나리 가지를 꺾어와 집안 곳곳에 두면 얼마 가지 않아 온 집안이 노랗게 변한다. 노란색, 봄의 색이다. 집안 곳곳이 노랗게 핀 개나리로 가득 덮이고 나면, 그제야 바깥 개나리들이 노란 봄을 품은 꽃봉오리를 피어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다시 봄을 맞이한다.
할머니가 왜 굳이 개나리를 꺾어 집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 기억에는 늘 있는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가득 개나리가 먼저 피고, 그다음에 바깥 개나리가 피고 그렇게 봄이 오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첫 번째 봄이 왔을 때야, 봄이 봄답지 않게 왔음을 알았고 할머니의 빈자리가 와 닿았다.
이제 막 중학생, 죽음을 알 듯 모를 듯한 나이였다. 이른 봄을 먼저 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찰나와 같은 짧은 봄을 더 길게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할머니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봄이 얼마나 짧은지 알게 되었다. 꽃이 피었네, 하는 순간 봄은 지나갔다. 어릴 적에는 꽃이 폈네, 하면 이제 봄이 오는 길이었는데 말이다.
'매일이 지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추나무] 나의 대추나무에 무엇이 걸렸나 (0) | 2020.08.10 |
---|---|
[진달래1] 서울 진달래 화전 (0) | 2020.08.08 |
낭독, 책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 (0) | 2020.05.29 |
170917 글을쓰고싶다 (0) | 2017.09.17 |
17.09.05 찰나 (0) | 2017.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