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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지금

[가로수] 매일 같지 않은 길

by 혜.리영 2020. 9. 16.

 

    나는 빽빽한 빌딩이 들어선 한복판으로 매일 출근한다. 저렇게 높은 빌딩이, 이렇게 넓은 길이 뭐가 좋냐고 퉁을 놓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으로서는, 그나마 쾌적한 출근길이라는 것에 점점 감사하게 된다. 그렇다 매일 오고 가는 출퇴근길은 일상에서 몹시 중요한 것이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은 강남 한복판, 차도도 인도도 넓고 쾌적하게 나 있고, 커다란 빌딩이 높낮이를 다투며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마다 가로수가 심겨 있다. 매일 똑같은 길을 걸으면 기시감도 없을 만큼 매일 똑같아서 지겹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매일의 출근길은 매일 달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근속 직장인의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에 눈이 와도 길에 눈은 쌓이지 않았다. 잘 정비된 탓도 있겠지만, 이른 시간 각 건물마다 계시는 경비 아저씨들이 긴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었다. 넓은 인도의 몇은 구의 것이었고 몇은 빌딩의 것이었다. 경비 아저씨들은 딱 빌딩의 몫만큼만 쓸었다. 저런 빗자루가 아직도 있나 싶은 싸리 빗자루, 알고 보니 눈 등을 쓸을 때는 여전히 그것에 제일 좋다고 한다. 최신, 최첨단이라는 강남 한복판도 눈이 줄창 오면 싸리 빗자루만 한 게 없는 것이다.

 

    춥다 하는 첫마디로 눈을 떴어도 전철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봄바람이 실려온다. 그럴 때면 나는 넓은 인도에 사람 부딪힐 일 없이 넓은 즈음에서 고개를 하늘로 치켜올린다. 그러면 하늘에 시선이 닿기 전에 연한 연두빛 안개가 내려앉은 가로수 가지들을 볼 수 있다. 봄이 오는 것이다. 아직은 춥다 하는 초봄이지만 저 위, 가로수 가지 끝에는 봄이 내려앉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면 내 마음에도 봄이 왔다. 일상의 봄은 그렇게 출근길 가로수에서 시작한다.

 

    여름이라고 다를까. 예상하듯 가로수는 잎이 넓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주로 심겨 있다. 울창한 잎들이 인도를 가득 덮어 그늘만 이어져 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사람과 부딪힐 일이 적은 즈음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걷는다. 늘 감는 지점이 있다. 그쯤 눈을 감고 얼마 걸으면 바로 두 눈에 하얗게 햇빛이 들어차는데, 딱 그때 눈을 뜨면 된다. 어느 빌딩 입구 앞이어서 드나드는 사람과 부딪힐 수도 있어 눈을 떠야 한다. 나는 그 구간을 좋아한다. 잎이 울창해져서 음지와 양지가 명확해지는 그때.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는 그냥 눈을 감고 뚜벅뚜벅 걷는다. 눈을 떠야 할 때는 알아서 햇빛이 들어차니 걱정할 것이 없다. 빛 올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그늘에서도 눈을 감고 걸어 나갈 수 있다. 엄청 용감한 듯 썼지만 실상은 정말 몇 걸음 되지 않는 짧은 구간이다.

 

    가을이 되면 커다란 잎이 춤을 추듯 떨어진다. 가을이 멜랑콜리한 이유 중에 하나가 낙엽이라고 한다.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낙엽이 사람의 시선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기분을 끌어내린다나.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너무 오래돼서 확실한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싸한 말 같긴 하다. 하지만 나는 가을, 가로수 낙엽이 떨어지는 길을 십 년째 걸으며 매번 같은 기대를 한다. 저 큰 플라타너스 잎을 떨어지는 채로 받아보고 싶다. 떨어지는 벚꽃잎도 여러 번 받았지만, 저 큰 잎 하나 받는 건 십 년째 못하고 있다. 

 

    매일 걷는 길에서도 매일 같지 않은 생각을 하는 건 내 탓이겠지. 생각을 끌어내고, 매번 같지 않은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서로 잘 악수하고 시간을 넘겨받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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